처음에는 실망 그 자체였다. 권순일 전 대법관이 2020년 9월 대법관 퇴임 후 불과 두달 만에 ‘화천대유’라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회사에서 월 1500만원의 돈을 받으며 고문을 했다는 언론보도를 접하고 나서다.
“대법관은 법관의 최고위직으로 국민의 기대가 큰 만큼 대법관을 마치자마자 대형 로펌에 취업한다든가 해서 사익을 도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평소 법관 생활을 마치고 나면 그동안 쌓았던 경험과 깊이 생각했던 바를 저술하고 후진을 양성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 왔습니다.”
지난 2014년 8월25일 국회에서 열린 대법관 인사청문회에서 당사자인 권순일 대법관 후보자가 밝힌 입장이다. 전관예우 논란에 쐐기를 박는 명쾌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생중계를 통해 전 국민에게 약속했던 그의 발언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권 전 대법관이 인사청문회에서 사익을 도모하지 않겠다는 발언한 것이 식언으로 드러난 순간이었다.
얼마 후 권 전 대법관이 검찰수사를 받는 피의자 신분이 되었다는 소식은 실망을 넘어 황당함 그 자체였다. 변협에 등록하지 않고 변호사의 직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권 전 대법관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전화 자문 정도만 했고 사무실에 출근하지 않았다”고 해명했지만, 매달 고문료를 받고 법률 자문을 하는 것이야말로 변호사가 직무 수행하는 일반적인 모습이다. 대법관 출신이 3년 이하의 징역까지 처할 수 있는 변호사법을 간과했으니 황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단순히 실망이나 황당함으로 그칠 수 없는 심각한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 지난 3일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이 대장동 사업의 수익 배분 구조를 설계하면서 권 전 대법관이 고문으로 있었던 화천대유에 천문학적인 액수의 개발 이익을 몰아줬다는 업무상 배임 혐의 등으로 구속되면서 전국을 강타한 성남시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의혹’ 때문이다.
의혹의 배경은 이렇다. 권 전 대법관은 지난해 7월 이재명 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한 대법원 전원합의체 재판에서 무죄 의견을 개진했다. 당시 이 지사의 혐의 중 하나가 대장동 개발사업과 관련한 것이었다. 문제는 이 지사에 대한 2심 판결문에 ‘화천대유’란 단어가 3번이나 등장함에도 권 전 대법관은 판결선고 되고 불과 4달 만에 화천대유에 법률고문이 된 것이다. 더욱이 화천대유 대주주인 김만배 기자가 2019년 7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8차례 권 전 대법관실을 방문한 것이 드러났다.
권 전 대법관이 변협에 등록도 하지 않고 법률 자문을 한 것은 법대로 심판을 받으면 그만이지만, 자신이 관여한 재판에 언급된 회사에 퇴임하자마자 법률고문이 되고, 회사 대주주와 여러 차례 만난 의혹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법원을 정의실현의 최후의 보루라고도 하지만, 우리 사회의 온갖 법적 분쟁의 최종적인 심판역할을 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 아무리 억울해도 대법원 판결이 선고되면 국민은 승복한다. 권 전 대법관은 재임 중 수십 만 건에 달하는 판결문에 그의 이름을 남겼을 것이다. 판결 당사자인 국민은 ‘권순일’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헌법이 부여한 대법관이라는 권위에 승복했다. 오직 법과 양심에 따른 판결이라는 신뢰, 그것이 곧 법치주의고 민주주의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1일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한 김상환 법원행정처장은 권 전 대법관의 처신에 대해 “이해관계인이라면 만나는 것은 부적절하다”면서 “저나 법관들 모두 이 사건에 대해 당혹감을 갖고 있다"며 곤혹감을 드러냈다. 권 전 대법관은 화천대유에서 어떠한 법률자문을 했는지, 김만배 화천대유 대주주와 만나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입장을 밝혀야 한다. 비록 판결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의 이름이 적힌 판결문에 말없이 승복한 수많은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의무다.
김한규 법무법인 '공간' 변호사·전 서울지방변호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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