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주 보이는 단어다
. ‘new normal’(뉴 노멀
).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새로운 보통
’쯤일까
. 사전적 의미가 그렇지 의미적 사용은
‘새로운 기준
’이다
. ‘코로나
19’로 인한 팬데믹 선언 수 개월 지났지만 아직도 끝은 보이지 않고 있다
. 그에 따라 세상 모든 것이 바뀌고 있다
. 전염병 하나가 시스템을 바꾸는 중이다
. 시스템은 우리 삶 그 자체다
. 삶 자체가 바뀌면서 기준이 새롭게 정립되고 있다
.
우선 ‘뉴 노멀’ 시대에 가장 예민하고 빠르게 반응하는 곳은 문화계다. ‘비대면’이 핵심 제시어가 되면서 ‘뉴 노멀’ 시대에 진입했다. 고사 직전 극장업계는 인력을 줄이고 무인 시스템을 도입하면서 소비자의 불안감 해소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업계가 살아남기 위해 차악을 선택 한 것이다. 이 선택은 업계 고용 불안을 가져왔다. 극장 업계가 희망 퇴직을 실시하며 인력 감축에 돌입했다. 익숙한 얼굴들이 자리를 떠났다. 아쉬운 건 그들과의 인연이 아니다. 삶의 보금자리를 다른 형태의 삶을 위해 포기해야만 하는 변화가 아쉬울 뿐이다. 이건 ‘노멀’도 ‘뉴 노멀’도 아닌 그냥 ‘강제적 기브업’일 뿐이다.
‘뉴 노멀’이 제시하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기준이 아직은 낯설다. 여기에 적응하기까지 겪어야 할 진통은 우리 예상을 훨씬 뛰어넘을 수 있단 게 더 두렵다. 얼마 전 IPTV를 통해 1998년 개봉작 영화 ‘가타카’를 다시 봤다. 유전자가 사회적 기준이 되는 세상을 그린다. 유전자의 우성과 열성 여부에 따라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삶이 규정되고 지배 받는다. ‘가타카’ 속 사회에선 개인 유전자가 신분증명서가 된다. 피 한 방울이 모든 소통의 시작이고 끝인 세상이다. 22년 전만 해도 이 영화는 판타지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 영화가 그려내는 세상에 코웃음을 칠 수 없다. 불과 22년 만에 세상은 ‘가타카 실사판’이 될 처지에 놓였다.
‘이태원 클럽’에서 시작된 전염병 확산이 증거다. ‘코로나19’에 상대적으로 강한 청년 세대는 ‘가타카’ 속의 우성인자 집단이다. 이들은 타고난 유전적 요소로 인해 사회 활동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 활동성이 보장된 이들은 사회 구조 속 피라미드 상층부에 자리잡는다. 반면 ‘가타카’ 속에서 자연임신으로 태어난 열성인자 집단은 우리 사회 중-장년층, 특히 노인 세대와 오버랩 된다. ‘코로나19’에 상대적으로 취약한 집단의 활동은 제한적이 될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사회적 제약을 ‘강제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현실이 닮고 있다.
소통의 창구인 입이 마스크로 가려진 지금이다. 귀는 열려 있다지만 상대 목소리를 듣는지 안 듣는지 알 수 없는 지금이다. 한편에선 “나는 걸려도 안 죽어”란 자신감에 차 있고, 다른 한편에선 집 밖을 나서는 것조차 두렵다.
기존 ‘노멀’이 더 이상 ‘노멀’하지 않게 돼 버린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앞다퉈 ‘뉴 노멀’ 시대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낸다. 등교 개학이 아닌 온라인 개학이 4차 혁명의 시작이라며 자화자찬한다. 비대면을 보장한 무인 시스템이 사람을 대신해야 오히려 안심한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기준, ‘뉴 노멀’이 끔찍하고 기괴하게 느껴지는 건 진정으로 나 혼자 뿐인가.
김재범 대중문화전문기자 kjb517@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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