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파도에 쓸리다 정체불명의 섬에 닿은 유랑자의 마음이었다. 미지의 행성에 발을 디딘 우주인의 심정이기도 했다. 지난 13일 연남동 '채널1969' 한 가운데 서니 꼭 그랬다. 푸르스름한 전구 빛으로 물든 지하 계단과 여기저기 스크래치가 난 콘크리트 벽돌, 정체불명의 파이프들, 덕지덕지 예술작품처럼 걸려있는 빈티지 포스터들…. 공간 곳곳에 분사된 건 온갖 것들의 낯섦과 생경이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더 기묘한 이야기들이 널려 있다. 누군가는 바(Bar)에 앉았고 누군가는 소파에 널브러져 있다. 펑퍼짐한 컬러 티셔츠와 와이드 팬츠, 레게머리와 벙거지 모자 차림. 맥주를 터뜨리고 마시며 그들은 음악에 취했다. 소위 ‘힙스터’라 불리는 이 시대의 잔상인 듯 했지만, 용어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 곳이 생경했던 건 그 언어 때문이라기 보단, 그 공기의 미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니 천진한 젊음들이 질서 없는 레몬즙처럼 터졌던 탓 아니었을까 싶다.
채널1969에서 열린 이날 공연은 이런 분위기 속에서 흘러갔다. 붕가붕가레코드(BGBG)가 기획한 '언박싱 vol.1-개봉기'. 선물 상자를 열듯 새로운 뮤지션을 만나보라는 게 모토다. 공연 끝에 알 수 있었지만 뮤지션들 역시 무대 아래의 그 부조화스런 레몬들 같았다. 록과 포크팝, 일렉트로닉 등 장르의 벽을 허문 실험과 파격이 공간 전체를 2시간여 휘감았다. 이날 무대에는 BGBG가 고른 올 상반기 주목할 만한 4팀(사뮈·혹시몰라·넘넘·놀이도감)이 릴레이식 공연을 펼쳤다.
지난 13일 연남동 채널1969에서 열린 '언박싱 vol.1-개봉기' 공연장. 서울문화재단 후원으로 진행된 이날 공연에서는 실제 '언박싱'이라 적힌 선물 상자를 관객들에게 제공했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저녁 8시경, 싱어송라이터 ‘사뮈’는 특이한 차림새로 무대에 올랐다. 앞으론 기타, 뒤로는 짐벌 카메라를 메고 있었다. 카메라는 관객보다 그의 뒤통수를 더 많이 비추는 듯 했다. 낮고 굵은 목소리로 그는 염세 속에 피어나는 작은 희망들을 노래했다.
3인조 밴드 ‘넘넘’은 마치 90년대 활동하던 소닉유스의 현대판 같았다. ‘노이즈의 미학’을 그들 나름의 사운드적 실험으로 완성시켰다. 찢어질 듯 삐걱대는 소음과 삐삐밴드 출신 이윤정의 앙칼진 목소리, ‘내 맘대로 할거라’며 세상을 향해 대신 뱉어주는 찰진 욕설….
기타 두 대와 율동만으로 뭉근한 분위기를 만든 ‘혹시몰라’, 실리카겔 멤버로 솔로 EP ‘플레이북’ 첫 라이브를 밴드셋으로 보인 ‘놀이도감’의 무대들도 다른 의미로 이 공연의 실험적 연속성 안에 있었다.
붕가붕가 출신 뮤지션들을 보면 줄곧 카프카가 떠오르곤 했다. 그들은 늘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 같았다. 장기하와 얼굴들, 불나방스타쏘세지클럽, 새소년, 실리카겔…. 특정 장르의 음악을 공장처럼 찍어내는 시대에 그들은 아랑곳 않았다. 10여년 자신들 만의 숨과 땀으로 음악을 빚었다. 날 것 같은 소리와 퉁명스런 디자인은 국내 유일의 ‘딴따라질’ 상징이 됐다.
10여년 축적한 그들의 ‘여로(旅路)’가 이날 그렇게 보였다. 낯섦과 생경의 이 4팀의 뮤지션들은 천진한 젊음을 터뜨렸다. 실험의 세계들을 노래하는 레몬들이 그 상자 안에 있었다.
밴드 넘넘의 무대 모습.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이 기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진행하는 '2019 인디음악 생태계 활성화 사업: 서울라이브' 공연 평가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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