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제자에게서 휴대전화로 사진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사진에는 한자(漢字)가 한 글자 찍혀 있었다. 더불어 그 한자가 무슨 자(字)인지 가르쳐달라는 내용도 적혀 있었다. 한자는 달필에 가까웠다. 평소 웬만한 한자는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나였지만, 그 한자는 아무리 봐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았다. 휘갈겨 쓴 한자였기 때문이다. 그 한자는 결혼식장에서 축의금으로 받은 봉투의 겉면에 쓰인 것으로, 이름의 한 글자였다. 나는 다시 내 주위의 한자에 해박한 전문가 몇 명에게 그 사진을 보내 한자를 해독해 달라고 했다. 결과는, 선뜻 그 한자가 무슨 자라고 자신 있게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럴 경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야속한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쓰인 한자가 아무리 달필에 가까워도 전문가도 읽어낼 수 없을 정도라면 악필과 동일한 값어치를 가지지 않을까. 양쪽 다 읽어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렇지 않아도 일부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자에 대한 거부감이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면, 이런 글자를 써서 유통시킨다는 것은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자에 대한 기피를 더 부채질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오해 없길 바란다. 나는 일상생활에서의 한자 사용에 대해 반대론자는 아니다. 만일 저렇게 한자를 휘갈겨 쓰는 사람에게 역시 읽기가 쉽지 않게 쓴 한글을 보여준다면, 그 반응은 어떨까. 분명 거부감이 찾아올 것이다. 나는 직업상, 매학기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끝나면, 한글과 한자가 동시에 쓰인 시험지를 채점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읽기 어려울 정도로 쓴 한글과 한자를 만나서 당황해 하는 경우가 있다. 난감할 수밖에 없다. 점수 부여가 쉽지 않다. 물론 악필인 학생에게는 나중에 별도로 주의를 주고, 역으로 글자를 예쁘고 바르게 쓰는 학생에게는 칭찬을 해준다. 그것이 어느 정도는 악필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
즉, 한자를 쓰건 한글을 쓰건 최소한 알아볼 수 있게 쓰자는 것이다. 문자는 소통의 중요한 수단의 하나다. 만일 그 기능을 상실한다면 문자로서의 기능이 없어질 것이다. 최소한 소통의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특히 한자쓰기를 즐겨 하는 사람일수록 더 유념해야 한다. 나 역시, 흑판에 한자를 판서할 경우에는 정자에 가깝게 쓰려고 노력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자를 읽기 어렵다는 불만이 들어올 수 있고, 제대로 의미 전달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발생하기 때문이다.
악필의 경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겠지만, 선천적인 악필보다는 후천적인 요인이 더 크리라 생각된다. 어릴 때부터 필기구를 잡는 습관이 잘못 들여져 고착화된 경우가 그러할 것이다. 또한 손으로 글씨 쓰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세태 역시 악필에 일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컴퓨터 자판으로 쓰고, 휴대전화나 카카오톡의 문자로 대신해도 불편하지 않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극단적으로 얘기하면, 연인끼리도 글씨체를 모를 수 있다. 손 글씨를 쓰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악필은 줄어들지 않을까. 손 글씨가 뇌 훈련에도 좋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이니, 제대로 된 필사본으로 시간을 갖고 노력하면 악필도 얼마든지 교정할 수 있을 것이다.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고 했다. 이는 중국 당나라 때 관리를 등용하는 시험에서 인물평가의 기준으로 삼았던 말이다. ‘몸, 말씨, 글씨, 판단’의 네 가지를 가리킨다. 이중, 글씨(書)는 그 사람의 됨됨이를 말해 주는 것이라 하여 인물을 평가하는 중요한 잣대의 하나로 삼았다. 컴퓨터가 일상화되기 전에는 직장에서 구인광고를 낼 때 자필이력서를 요구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글씨를 쓸 때 분명 남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악필은 안 된다. 중요한 소통의 수단인 문자가 왜 남에게 소통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어야 하는가. 한자도 한글도 상대의 가슴에 얼마든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길 수 있다. 그렇게 될 때 문자는 단순히 글자의 개념을 넘어서 문화가 되기도 하고 예술이 되기도 한다. 사랑의 매개체가 될 수도 있다. 새해부터 왜 글씨 타령인가 할지 모르겠다. 손으로 정성스럽게 글씨를 쓰는 습관을 들이고, 거기에 더하여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담은 손 편지를 쓰는 시간이 늘어난다면, 세상도 그만큼 더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석륜 시인/인덕대학교 일본어과 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강영관 산업2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