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종용 기자] "털어서 먼지 안나오는 사람 있나.", "적폐청산은 핑계고, 칼바람이 시작된 것이다."
금융당국과 시중은행의 채용비리 사건으로 부정부패와 불공정, 특권 등 '적폐'가 금융권의 화두로 부상했다. 그러나 정작 채용비리 당사자인 금융권은 이 같은 적폐 행위 적발과 사정당국의 조사를 정권 교체 후 시작된 '인사 칼바람' 정도로 보는 듯 해 씁쓸하게 하고 있다.
채용비리 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면서 금융권은 살얼음판을 걷고 있다. 이광구 우리은행장은 특혜 채용에 대한 책임을 지고 지난 2일 돌연 사임했다. 지난달 국감에서 관련 의혹이 불거졌을 때만해도 사태 해결에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했으나, 검찰 조사가 불거지면서 행장까지 그만두는 사태로 비화했다.
채용비리 의혹으로 수사선상에 오른 김용환 농협금융지주 회장도 불안한 처지다. 현재 김용환 회장은 수출입은행 간부 자녀의 금감원 채용 청탁을 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지난달 25일 김 회장의 농협금융 집무실과 자택을 압수수색했다. 김 회장은 지인의 부탁으로 채용 진행 과정을 확인했을 뿐 채용 결과에 대한 압력을 행사하진 않았다는 입장이다.
금융권 고위직 인사가 줄줄이 옷을 벗으면서 금융권에서는 사정당국발 인사태풍이 시작된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검찰 조사에서 관련 혐의가 드러나기도 전에 수장들의 거취가 위태로워지면서 "윗선에서 내려온 뭔가 있겠지"라는 음모론이 제기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채용비리 사태가 취업준비생들과 그 부모세대를 분노케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금융권 일각에서 보이는 '피해자 코스프레'는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대표적인 해명은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규제산업으로 정부 정책의 영향을 많이 받는 금융기관이 정관계 청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기 어려운게 현실이라는 것이다.
"현직 경영진 체제에 불만을 품은 내부 투서로부터 시작됐다"는 얘기도 있다. 채용 합격자 가운데 청탁이 있었던 직원 명단을 내부자가 경영진을 내보내려는 '불순한 의도'를 갖고 유출했다는 것이다. 여러 금융사가 합병해 탄생된 한국 금융기관의 특성상 고질적인 계파 갈등이 배경에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 같은 방어 논리와 달리 이런 일이 실제로 가능했느냐를 따져보면 얘기는 달라진다. 시중은행의 전임 인사담당자는 "채용 비리 의혹의 문건을 보자마자 인사부에서 작성한 문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며 "인사 팀장, 부장을 거친 정식 라인은 아니지만 임원급에서 따로 관리하는 비공식 라인"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채용 당락에 영향을 미쳤는지 아닌지는 검찰 조사에서 따져볼 문제"라면서도 "대형 거래처나 정부 고위직 자녀의 경우에는 블라인드 채용이 시행된 후에도 내부적으로 따로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채용비리로 의심받을 수 있는 정황은 그동안 있었으며, 언젠가 터질 일이었다는 얘기다. 금융사는 잘 새겨야 한다. 내부 투서의 의도가 무엇이든, 어떤 고위층의 갑질이었든지 간에 채용비리 정황이 있었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다. 국민의 불신이 커지고 있는 이 시점에서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는 것은 '책임 회피'라는 오해를 부를 수 있다. 그간의 채용 비리가 고질적인 적폐가 아니었는지, 고쳐야 할 게 무엇인지 돌아보는 게 먼저다.
이종용 기자 yong@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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