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한영 정경부 기자
#1. 20세기 최고의 외교 전략가 중 한 사람으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꼽힌다. 1979년 미중수교를 진두지휘하며 ‘데탕트(긴장완화)’ 시대 초석을 놓은 그는 이후 1992년 한중수교 과정에서도 영향을 끼쳤으며, 2000년대 조지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의 외교 가정교사로 불리기도 했다. 한 사람의 전략가가 4반세기 넘게 세계 외교사에 족적을 남긴 것이다. 지금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자문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독일 통일 과정을 봐도 마찬가지다. 동독의 실체를 인정하고 교류를 촉진하는 ‘동방정책’으로 잘 알려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 옆에는 에곤 바 특임장관이, 통일 독일의 주역 헬무트 콜 총리 옆에는 한스 디트리히 겐셔 외교장관과 호르스트 텔칙 연방총리실 외교안보보좌관이 있었다. 비전을 지닌 국가지도자 옆에 그에 걸맞은 걸출한 참모들이 언제나 자리했다.
#2. 지난 7월 초, 청와대 고위관계자 몇 명이 춘추관으로 와서 비보도 전제 백브리핑을 실시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첫 미국방문과 북한의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4형’ 1차 시험발사 직후인지라 기자들이 다양한 관련 질문을 쏟아냈다. 이에 대한 청와대 관계자의 답변은 대부분 “관련국과 잘 협의하겠다”, “분석 중이니 기다려달라”는 수준에 그쳤다. 급기야 한 기자가 “이런 식의 백그라운드 브리핑은 아무런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는 당국자들의 입장을 십분 이해한다 치더라도, 듣는 입장에서 답답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날 하루의 해프닝으로만 끝나면 다행이겠지만 우리 정부의 외교정책을 놓고 답답하다거나 불안하다는 지적은 계속 나온다. 문재인정부 인수위 격인 국정기획자문위원회에도 참여했던 한 인사는 최근 “정부의 외교정책은 ‘더디지만 가고 있으니 믿어달라. 상황이 어그러지고 있지만 참아달라’는 것으로 요약된다”고 촌평했다. 우리 외교의 비전과 철학이 확실하다면 속도는 그리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문제는 과연 그러냐는 것이다.
지난 3일 북한의 ‘수소탄 실험 성공’ 발표로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상황은 이전과 양상이 바뀌는 모양새다. 북한이 지속적으로 사거리를 늘려가고 있는 ICBM급 발사체에 수소탄 장착이 현실화된다면 미국이 동북아시아 각국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뀔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이런 상황에서 청와대 주변에서 주로 언급되는 내용은, 문 대통령이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 밝힌 ‘북한이 ICBM을 완성하고 거기에 핵탄두를 탑재해서 무기화하게 되는 것이 레드라인’이라는 발언에 비춰볼때 이번 경우는 어떠냐는 수준에 머문다. 국민들이 안고 있는 불안감을 털어내고 위기를 기회로 바꿔낼 장기적인 플랜이 무엇인지도 잘 보이지 않는다.
결국 사람의 문제다. 현 정부 고위직과의 친분 여부를 떠나 인재를 구하고, 장기적으로는 키워내는 노력이 필요하다. 김대중 대통령은 취임 후 첫 통일부 장관에 보수파인 강인덕을 임명해 햇볕정책을 이끌어냈다. 트루먼 대통령 시기 미 국무장관에 오른 조지 마셜은 취임 후 국무성 내에 정책기획국을 신설하고 조지 케넌을 국장으로 발탁한다. 케넌 국장은 마셜 장관의 바로 옆방에서 소련 봉쇄는 물론 전후 유럽부흥의 초석을 놓은 마셜 플랜도 입안한다. 문재인정부는 지금 어디까지 와있나.
최한영 정경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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