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사박물관 로비전시실에는 7월13일부터 8월27일까지 ‘서울, 기억과 풍경’이라는 제목으로 한영수(1933-1999) 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전시된 40여 점의 사진들은 1956년부터 1963년 사이에 촬영된 것들이다. 이 시기에 촬영된 한영수 작가의 더 많은 사진들이 지난 4월29일~6월6일에도 '내가 자란 서울'이라는 제목의 ‘한영수 기증유물특별전’에서 선보인 바 있다. 아직 전쟁의 상처와 후유증이 남아 있던 시절에 대해 한영수 작가는 “도시에서, 농촌에서, 시장에서, 또 어린이들의 초롱한 눈망울 속에서 잊어버렸던 희망과 웃음을 찾을 수 있었고, 잠시 잃었던 인간성도 회복해 가고 있었다”(<삶: 1956-1960>, 1987)고 술회했다.
지난 4월 서울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사진작가 故 한영수 기증유물특별전 '내가 자란 서울' 개막식에서 내빈들이 전시를 둘러보고 있는 모습. 사진/뉴시스
아이들의 웃음은 희망의 노래이다
한영수 사진작가가 한국전쟁 후의 조국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에는 아이들의 모습이 많다. 1950-60년대 어린이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 '꿈결 같은 시절 Once Upon a Time'이 2015년에 출간된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전후 물리적, 심리적 폐허 속에서 기아와 절망, 상실감에 시달리던 시절,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계속되고 나아가 극복과 재건을 향해 달려가던 시절, 아이들의 티 없는 웃음이 주는 청량감은 미래를 위한 가장 강력한 힘이고 희망의 메시지였을 것이다.
아이들은 모든 것이 파괴된 폐허의 공간을 놀이공간으로 변형시켜내고, 그들이 접할 수 있는 주위의 모든 것―흙, 눈, 얼음, 돌, 나무, 떨어진 문짝, 굴러다니는 건축자재 등―을 놀이도구로 바꾸어냈다. 맨발로, 검정고무신으로 뛰어다니며 배를 곯으면서도 동무들과 놀 때는 그조차 잊고 해맑게 웃던 아이들이 60, 70년대 대한민국의 산업화 시대의 주역이었고 이제 노년에 접어든 세대가 되었다. 이제 골목에도, 길가에도, 한강변에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보기는 힘든 시대에,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제 몸집만한 가방을 메고 다니는 아이들이 일상적 모습이 된 시대에, 전시회를 찾은 젊은 부모들이 그들의 어린 자녀들에게 자신들도 살지 않았던 시대의 아이들이 노는 사진들을 함께 관람하며 설명을 하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것은 영화 <국제시장>(2014)이―신파적 성격으로 인한 영화적 완성도 논란, 또는 정치성 논란 등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전후 비참한 시대를 살아온 부모·조부모 세대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도 주목을 받았던 이유와 흡사할 것이다. 말하자면, 특정한 역사를 직접 경험하지 않은 세대가 사진·영화와 같은 예술 매체를 통해 그것을 간접적으로 체험·학습하면서 직접 경험한 세대와의 간극을 좁혀나가는 과정이라 하겠다. 그것은 혹자에게 과거에 대한 이해일 것이고 또 다른 혹자에게는 반추가 될 것이며, 또한 그들 모두에게,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현재에 대한 성찰이자 미래에 대한 준비가 될 것이다.
지난달 13일부터 8월27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한영수 사진전을 관람 중인 한 가족의 모습. 사진/필자 제공
<만인보>의 고향마을 아이들과 차탕족 아이들
<만인보> 1-9권이 다른 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정겹게 다가오는 것은 고은 시인의 고향마을 사람들, 즉 필부필부(匹夫匹婦)들이 주로 등장해 우리네 삶의 편린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속에 종종 등장하는 것이 아이들의 모습이고, 여기에는 유년시절의 저자도 포함된다. 한영수 작가의 사진들 속에서 아이들이 주는 함축적 메시지가 <만인보>의 시들 속에 시인의 독특한 필체로 펼쳐져 있는 것이다.
두메 촌놈으로 태어나면
대여섯살에 벌써
노는 놈 없다
산같이 쌓인 일에 아버지 따라 일꾼 되어야 한다
가을 오면
우렁 잡아오라는 어머니 말 듣고
논으로 달려가
드넓은 논바닥
우렁 뒤지는 한나절 좋다 참 좋다
그놈의 일구더기 떠나서 좋다
병옥이
우렁 잘 잡는 병옥이
양잿물 잘못 먹고 죽어버렸다
동네 아이들 병옥이 무덤 아무도 몰랐다
아이들 죽어야 무덤도 없다 < … >
(‘병옥이’, 2권)
병술이 동생 낳고 자주 앓던
병술이 어머니
옥정골 품팔러 가서 밭에서
피 쏟고 업혀와 세상 떠났다
< …>
병술이 동생 두살 세살
밥티 뜬 밥물 먹고
가물에 콩 나 동네 젖 얻어먹고
재넘이바람에 말씬말씬 자라나서
썩은새 처마끝 참새집
참새새끼 바라보며
두 손 내저으며 좋아한다
아직 이름도 없이
물똥 잘 싸니
물캐똥이라 불렀다
제 어머니 살아 있으면
체 남의 아들보고 물캐똥이 뭐여 된똥도 싸는데
보아라 석삼년 지붕 이엉 케케묵었으나
그 밑으로 먼 하늘 뼈 마디마디 새롭다
(‘병술이 동생’, 2권)
대여섯 살이면 “산같이 쌓인 일”을 부모와 함께 해야 하지만 우렁이를 잡기 위해 논바닥을 뒤지는 것도 놀이가 될 수 있는 두메의 아이들의 모습, 엄마 없이 동냥젖을 먹고 자랐지만 “참새새끼 바라보며 / 두 손 내저으며 좋아”하는 ‘물캐똥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은, 어려운 시대상, 곤곤하고 궁핍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미래에의 희망과 내일에 대한 믿음을 불러일으킨다.
필자는 최근, 그 시절의 우리 아이들을 연상시키는 아이들을 만나는 드문 경험을 했는데, 러시아 접경 지역인 몽골의 북부, 타이가 삼림지대에 사는 차탕족 어린이들이 바로 그들이다. 차탕(Tsaatan)족은 몽골어로 ‘순록(tsaa)’에서 유래했듯이 순록을 방목하며 살아가는 유목민 부족으로, 시베리아에 거주하는 러시아연방 투바공화국 민족의 일부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들은 투바어와 몽골어를 다 구사한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버스로 15시간을 달려 북쪽 흡스글(Khövsgöl)주의 주도인 므릉(Mörön)에 도착한 후, 다시 험로주행용 차량으로―차의 상태에 따른 차이를 감안해―약 13~16시간가량을 달리면 차강노르(Tsagaannuur, ‘하얀 호수'라는 뜻)읍에 이르는데, 여기서부터는 여름철 유일한 교통수단인 말을 타고 가야 한다. 살리그 다와(Saalig davaa)라는 산을 빗속에 넘어 약 8시간 만에 다다른 곳이 동(東, zuun)타이가 지역의 차탕족 순록마을이다. 경마대회에 수차례 우승한 차강노르의 유목민으로, 말들을 관리해주는 타우가에게 혼자 갈 경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를 물으니 4시간 정도라 한다. 숲과 산의 길은 말들도 힘들어할 만큼 험해 그들에게 매우 미안하지만, 반면 그만큼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차탕족 순록마을 아이들의 모습. 사진/필자 제공
동타이가에 백여 명, 서(西, baruun) 타이가에 백여 명을 합쳐 순록을 기르며 살아가는 순수한 유목민 차탕족은 약 200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추정된다. 자연과 순록들 그리고 순록을 늑대로부터 지키기 위해 짖을 때 빼고는 순하기 그지없는 개들이 이 마을 아이들의 놀이친구이다. 물론, 서로 부둥켜안고 맨발로 순록의 똥이 구르는 풀밭에서 까르르 웃어대며 뒹굴고 노는 또래의 친구들이 서로에게 최고의 놀이친구일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는 외부인들이 선물하고 간 공이 거의 유일한 장난감인 셈이다. <만인보>의 다음시를 읽으며 전혀 다른 역사와 환경 속에 있는 이 볼 빨간 아이들을 새삼 떠올리는 것은 한반도의 아이들과 타이가의 아이들을 이어주는 어떤 공통점 때문이다.
평화는 궁핍 옆에 와 있다
강원도 황계
전쟁 멈춘 2년 남짓인가
폭격으로
파인 웅덩이에 물 담겨
내일모레 살얼음 얼겠구나
일곱살
아홉살 아이들
밖에 나오면
거기가 천당
헌 벙거지 쓴 놈
눈곱재기
콧물 고드름 단 놈
이빨 빠진 웃음
할망구 웃음
개 한 마리도 덩달아 끼어들어 꼬리 바쁘다
이로부터 녀석들 사는 천당이 펼쳐진다
뒷날 < … >
면 세무계장 하나
그리고
고랭지채소 재배업자
산약초꾼
그리고 장돌뱅이 마누라
다방 주인
아이 팔남매 둔 술꾼 아비
닭장수 마누라
뒷날 닭 몇천 마리
날마다 죽이는 토종닭 닭곰탕집 마누라
전쟁 뒤가 평화다 평화는 짤막하다
찢어진 산천
봄에
여름에 꽃 필 산천
일곱살
아홉살
열살
거기가 천당
(‘횡계 아이들’, 20권)
순록마을의 현실
세계의 순록부족 가운데 가장 원형적인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는 차탕족이 처한 현실에 대한 우려는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소비에트 공화국의 몰락 이후 민주화운동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게 된 몽골은 소비에트 시절 정책적으로 보호받던 순록유목이 순록의 사유화 과정에서 여러 난관에 부딪치게 된다. 게다가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에 걸쳐 외국에서 순록의 뿔을 대량으로 구입해 가는데, 적지 않은 양이 중국 중개상들을 통해 한국으로도 들어와 녹용으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게다가 관광객들의 유입이 차탕족 생활 기반을 흔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관광객들을 상대로 돈을 벌기 위해 멀리 떨어진 산에서 흡스글 호수까지 내려온 차탕족 몇 가구들의 경우, 그들 나름의 사정이 있어 행한 선택이겠지만, 순록에게는 전혀 적합하지 못한 서식환경으로 인해 순록들이 죽어가 안그래도 감소하는 순록의 개체수가 더욱 위협받게 되었다. 몽골의 최대 관광지인 흡스글 호수에서, 산 속에 방목될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하고 온종일 매여 있는 순록들은 시들어가고, 그들 위에 연달아 올라 사진을 찍어 추억을 남긴 이방인들은 졸지에 순록의 생명을 위협하는데 일조하게 된 셈이다.
차탕족이 모여 여름을 함께 나는 산속의 순록들은 온종일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늑대로부터의 위협을 피해 잠시만 묶여 있으면 된다. 그 순록들과 사람들의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이유는, 적절한 환경에서 느긋한 나날을 보내는 순록들의 평화가 그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들의 평화로 직결되기 때문일 것이다. 몽골 유목민의 이동식 주택인 ‘게르’보다 더 단순하고 더 간편히 지어진 차탕족의 오르츠(혹은 티피)는 조금만 상황이 바뀌어도 순록의 최적 환경을 위해 언제든지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그들의 생활방식을 대변하고, 삶의 동반자인 순록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다. 그들이 순록의 뿔에 조각을 해 멋진 공예품을 만들어 관광객들에게 판매할 때 그 뿔은 순록이 자연적으로 뿔갈이를 해 낡은 것이 되었기 때문이지, 건강한 뿔을 억지로 잘라 종의 번식마저 위태롭게 하는 행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차탕족은 순록의 수가 줄어들면서 뿔을 자른 행위가 낳은 폐해를 깨달은 바이다).
평화롭게 휴식 중인 순록의 뒤로 차탕족의 이동식 주택인 오르츠(티피)가 보인다. 사진/필자 제공
얼마전 몽골에 새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차탕족의 관심은 예전에 가구별로 성인·어린이의 숫자에 따라 받던 정부의 지원금이 새 행정부에서도 계속될 지 여부에 쏠려 있다. 바뀌는 사회적 환경 속에서 소수로 살아남은 그들이 자연과 공존하는 전통적 삶의 방식을 지속하는 데는 공적 지원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가난했던 우리는 산업화를 통해 전통적 삶의 방식으로부터 멀어졌고 부의 축적만큼 빚도 늘고 사회계층 간 간극도 커졌다. 개똥밭을 뒹굴며 뛰어놀던 아이들도, 얼어붙은 한강에서 썰매를 지치던 아이들도 사라진 지 오래이다. 차탕족 아이들도 학교에 가려면 한참 떨어진 차강노르의 기숙학교에 가야하고 그 교육을 뒷받침하기 위해 부모들은 어떻게든 돈을 모아 차강노르에 작은 집을 사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가난한 유목민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의 방식과 그 가치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이 이 가치를 계속 이어가는 이상 아마도 그러할 것이고, 우리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교류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아주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하고 웃고 행복해하는 차탕족 아이들―사실 몽골의 유목민 아이들도 그러하고 우리의 옛 아이들도 그러했다―의 밝은 표정을 본다면 한영수 사진전의 아이들과 <만인보>의 아이들이 떠오르고 그들의 긍정적 에너지가 전파되어 당신은 어느덧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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