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문제가 누적되고 장래의 경제발전에 관한 비관적 전망이 확산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지속적이고 건전한 경제발전을 위한 제도적 대안으로써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한 논의가 활성화되고 있다. 특히 이 문제가 일부 정치권에서 제기되면서 사회적 시장경제는 보다 실천적 의미로 다가서고 있다.
독일의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의 관심대상이 아닐 수 없다. 첫째, 독일은 선진공업국가들 중에서 사회적 안정과 경제성장을 조화롭게 추구한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선진공업국가들 중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업평화가 가능하게 된 배경에는 사회적 시장경제라는 제도적 장치가 작용하고 있다.
둘째, 사회적 시장경제는 무엇보다도 독일통일을 실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뿐만 아니라, 통일이후 동서독 주민들 간의 갈등을 해소하고 사회적 통합을 실현하는데 있어서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회적 시장경제제도를 통한 ‘효율과 형평’의 조화는 당시에 동독 주민들이 자유의사에 의한 표결과정을 거쳐 서독체제로의 편입을 선택한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이러한 성과는 특히 통일을 역사적 과제로 안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설득력 있는 독일제도의 장점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렇다면 사회적 시장경제는 수용 가능한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을 것이며, 특히 한국의 문화적 가치, 전통가치관이 서구제도를 수용하는데 있어 얼마만큼 상호조응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사회적 시장경제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다. 즉, 이 제도 역시 독일적 문화와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며 이를 이식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이러한 문화적 토양의 차이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 중요한 차이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일반적으로 유럽사회, 특히 독일의 사회문화적 특징 중 하나는 사회구성원간의 강한 연대의식이다. 사회적 시장경제 역시 이러한 의식구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어느 선진국보다도 앞장서서 독일이 사회복지체계를 도입하고, 사회적 한계집단의 통합, 노사공영제도를 비롯한 경제민주주의를 정착시킬 수 있었던 것는 바로 그러한 연대성의 문화적 토대가 마련됐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우리 사회에는 이기주의적 축적의 가치관이 지배적이다. 혈연이나 지연과 같은 전통사회의 가치관은 시장사회를 특정지우는 익명의 관계 속에서 연대성에 기초한 공동체 정신으로 승화하지 못하고 있다. 불신의 사회인 것이다.
둘째, 사회적 시장경제는 국가에 의한 시장의 경쟁질서 창출기능을 중시한다. 시장의 경쟁질서는 질서를 지키는 질서의식을 전제로 한다. 독일인들의 문화적 유전인자 속에는 여러 학자들이 지적한바와 같이 질서와 원칙을 중시하는 요인들이 내포돼 있다. 독일의 질서자유주의는 바로 이같은 시민사회의 질서의식을 전제로 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한국의 질서의식은 대단히 취약하다. 여러 연구기관들의 연구가 보여주는 바와 같이, 한국의 법치는 선진국가들 중 거의 최하위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마지막으로, 경제주체들의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능력과 사회적 책임의식이다. 사회적 시장경제가 그동안 원만하게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당사자들의 ‘합의에 의한 이익추구’라는 파트너정신과 고도의 사회적 책임의식을 전제로 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독일은 선진국가들 중 가장 강력한 노동조합을 보유하고 있다, 그럼에도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희생된 노동시간은 가장 적다. 또한 지난 10여년 간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상승률 역시 여타 선진국에 비해 현저하게 낮고 생산성상승률을 밑돌고 있다. 이와 같은 이익집단의 집단이익에 우선하는 사회적 책임감은 사회적 시장경제의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조건들은 비단 사회적 시장경제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은 그동안 전근대적 제도와 낙후된 법치의 전통 및 윤리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압축성장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제도의 낙후성이 경제발전의 질곡으로 작용하는 단계에 진입해 있다. 스미스는 그의 대표적 3대저서, 도덕 감성론, 법학론 그리고 국부론에서 시장경제의 작동조건으로써 윤리질서-법질서-경제질서의 유기적 연계성을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의 우리에게 이보다 더 중요한 교훈은 없을 것이다.
지난해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총리가 서울 여의도 전경련회관 컨퍼런스센터에서 열린 한국경제연구원 주최 특별대담에서 특별강연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국가미래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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