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함상범기자] 배성우는 '다작요정'으로 통한다. 지난해부터 출연한 영화가 대략 열다섯 작품이 넘는다. 재밌는 점은 어떤 작품을 해도 클리셰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떤 인물을 연기하든 모두 새로운 인상을 남긴다.
많은 작품에 출연한 덕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이경영", "소가 이경영처럼 일해야 한다"라는 명언을 남긴 이경영의 가장 강력한 대항마로 떠올랐다. 그리고 지난 22일 그가 출연한 두 영화 '특종:량첸살인기(특종)'와 '더 폰'이 개봉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부채장수와 우산장수를 둔 어미의 심정이라고 표현했고, '리틀 이경영'이 겪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도 했다.
배성우. 사진/NEW
지난 21일 만나 소감을 물었다. 이에 배성우는 "지난해 들어오는 작품이 스케줄이 크게 무리가 되지 않아서 많이 찍었는데, 올해로 넘어온 작품이 많았다. 그래서 다작하는 사람으로 보이는 거다. 이제 '열정 같은 소리 하고 있네'랑 '내부자들' 밖에 안 남았다. 그렇게 많지도 않다"며 미소를 지었다.
좀더 자세한 속사정을 들어봤다. "'특종'은 추석 개봉 예정이었는데 조금 밀렸고, '더 폰'은 올 연말 아니면 내년이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당겨졌다. 그래서 이 꼴이 났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자신과 싸워야 하는 입장에 놓인 배성우에게 두 작품의 촬영기를 들어봤다.
배우 배성우는 새 영화 '특종:량첸살인기'에서 집요하게 헛발질을 하는 경찰 오 반장 역할을 연기했다. 사진/롯데엔터테인먼트
◇'특종'의 배성우
영화 '특종'에서 배성우는 경찰 오 반장으로 나온다. 오랜만에 굉장히 멋있는 역할이다. 모자란 구석을 조금씩은 보여 왔던 전작과 달리 스마트해 보이고 치밀해 보인다. 하지만 그렇게 보이기만 할 뿐 집요하게 마지막까지 헛발질만 하는 인물이다.
앞서 노덕 감독은 자신이 그린 오 반장과 리딩 때 배성우가 보여준 오 반장과 갭이 너무 커서 놀랐다고 했다. 감독은 그렇게 웃긴 캐릭터로 만든 게 아니었는데, 배성우는 엄청 웃긴 캐릭터로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오 반장이 줘야 하는 긴장감이 있는데, 그 축이 무너질까 걱정했다고 했다. 노덕 감독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내가 먼저 물어봤었다. '오 반장, 웃기려고 만든 거 맞죠?'라고. 그 때 분명 그런 캐릭터 맞는다고 했다. 근데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너무 웃긴 거였다. 사실 나는 오 반장이 엄청 웃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집요하고 치밀하게 헛발질을 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나중에 노 감독이 웃기긴 한데 톤이 생각한 것과 다르다고 하더라. 작품에 녹지 않는 건 아니지만, 좀 더 중심을 잡고 가보자고 하더라. 일리가 있는 말이어서 그렇게 갔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배성우가 노 감독의 디자인을 완벽히 이해한 듯했다. 웃기려는 노력이나 과잉된 표정 하나 없이도 웃음을 준다. 스마트해 보이는 바보 같은 아이러니한 매력을 가진 캐릭터가 오 반장이다. 조정석이 연기한 허무혁만큼이나 잔상이 남는다.
"제가 게으른 점도 있지만, 웬만하면 정확히 서거나 앉아서 대사를 한다. 그래야 관객들도 명확하게 듣는다. 연기할 때 많은 걸 보이는 것도 좋지만 쓸데없는 걸 빼는 것도 중요하다. '특종'에서도 쓸 데 없는 걸 많이 뺐다. 그래서 더 재밌게 봐주신 것 같다."
배우 배성우는 영화 '더 폰'에서 살인청부업자를 맡았다. 사진/NEW
◇'더 폰'의 배성우
'특종'에서 배성우가 풍성한 인물을 그렸다면 '더 폰'에서는 묵직함으로 관객과 마주한다. 선이 굵고 진한 연기다. 손현주가 마치 한 마리의 짐승처럼 달리고 있을 때 작품에 현실감을 불어넣는다. 기존과 사뭇 다른 배성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신 스틸러'가 아닌 주인공으로 손현주, 엄지원과 함께 나선다. 무서운 살인청부업자다. 감정이 없이 업무로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는 역할이다 보니 등장만하면 싸늘하다. 배성우는 이 살인청부업자마저도 웃기게 보였다고 했다.
"대본만 봤을 때 유연하고 나이브하면서 뻔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좀 웃겼다. 하는 짓이 웃긴 게 아니라 뻔뻔한 게 웃겼다.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오는 느낌이다. 그래서 리딩 때 살짝 웃겼다. 그런데 김봉주 감독이 그렇게 되면 사이코패스 같아 보인다고 좀 톤을 다운시키길 바랐다. 생활형 살인자라는 점에서 매력이 있었고, 나름대로 유머지점을 발견했지만 영화에 더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 색을 좀 죽였다."
'더 폰'은 마치 짐승 한 마리가 고속도로를 달려 나가는 느낌을 주는 영화다. 선악구도가 명확하고 시간의 배분이 어렵게 꼬여있다. 해석하면서 따라가기 다소 어려운 지점이 있다. 대신 몰입도와 긴장감은 강렬하다. 영화의 매력을 살리기 위해 캐릭터를 좀 더 묵직하게 그려냈다는 게 그의 말이다.
"연극할 때도 빨리 호흡을 가져가면서 긴장감을 끌어올린다. 그런데 자칫 너무 호흡이 빨라지면 관객들은 몰입을 하지 않고 구경을 해버린다. 완급조절이 중요하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통하려면 빠른 호흡이 긴장감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런 중에 내 캐릭터마저 복잡해 버리면 관객들이 구경을 할 수가 있다. 그래서 인물을 더 명확히 만들었다."
색이 다른 두 영화가 한 날 한 시 개봉했고, 그 안에서 배성우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한다. 두 영화에서 배성우가 차지하는 비중과 그가 만들어내는 몰입도가 상당하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배성우를 보는 것만으로도 티켓 값은 충분히 하는 두 작품이다.
◇"인물에 풍덩 빠지려면"
배성우는 보이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가진 인물을 연기하는 지점이 좋다고 말했다. 인물을 작품 내에서 구현해내기 위해서는 인물에 '풍덩' 빠져야 한다는 게 배성우의 연기 지론이다.
"모든 사람마다 다 선악이 내재돼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에게는 많은 결들이 있다. 내가 맡은 역할은 다 입체적이면 좋겠다. 한 신, 한 컷마다 드러나야 한다. 나의 경우 연기 할 때 인물을 만든다고 생각하지 않고 풍덩 빠진다고 생각한다. 악한 사람이라고 웃길 줄 모르는 건 아니다. 그렇게 어떤 역할이든 유머를 찾아내고 깊이 있게 쫓아가면서 풍덩 빠지는 게 배우로서도 소모가 덜 되고 덜 힘들 뿐더러 보는 사람도 더욱 몰입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풍덩 빠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연극판에서 오랫동안 경험을 쌓고,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훌륭한 연기를 펼치는 그임에도 아쉬운 장면이 나올 때가 많다고 했다.
"너무 스치듯 흘러가서 사람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나는 정확히 안다. 앞으로는 계속 어떤 인물이든 확 잠기고 싶다. 그렇게 잠기려면 정확히 분석해야 한다. 뾰족하게 인물을 분석해야 빠질 수가 있다. 어느 방향으로 들어갈지 알아야 빠지지, 무조건 빠질 수는 없지 않나. 아직 더 노력해야 한다."
44세에 영화 주인공을 처음 꿰찼다. 오랜 무명 끝에 이름을 알리고 있는 배성우는 어떤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 '다작요정'이라는 별명답게 그의 대답은 "다작을 오랫동안 하고 싶다"였다.
"어차피 연기를 바라보는 눈은 개인취향이다. 누군가는 호평을, 누군가는 혹평을 내린다. 그렇다면 나만의 것이 있어야 하고 세계관도 있어야 한다. 그게 연기에 나온다. 연기를 잘 해낸다는 것은 그래서 복잡한 것 같다. 그리고 이제는 작품을 전략적으로 선택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소모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모든 미션을 완수하고 많이 오랫동안 연기하고 싶다. 놀면 뭐하겠나? 하하."
함상범 기자 sbrai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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