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노동절을 맞아 근로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안겼다. 연방 정부의 계약직 노동자들이 연간 최대 일주일의 유급 병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행정 명령에 서명을 한 것이다. 이 명령에 따르면 2017년부터 연방 정부의 계약업체 직원들은 30시간 근무할 때마다 1시간의 유급 병가를 사용할 수 있다. 1년간 일한 근로자의 경우 본인이나 가족의 건강을 위해 최대 7일의 유급 휴가를 신청할 수 있다. 30만여명이 혜택을 볼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1월 연방 정부 공무원들에게 6주간의 유급 휴가를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에 이어 계약직 근로자로 혜택의 범위를 확대한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전역의 모든 근로자가 자유롭게 유급 휴가를 사용하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고 있다. 이를 위해 의회에 '건강한 가족법(Healthy Families Act)' 통과를 촉구할 계획이다.
◇마리사 메이어 야후 최고경영자(CEO)의 딸 쌍둥이 임신 소식은 미국의 열악한 유급 출산휴가 제도에 대한 논란을 키우는 계기가 됐다. (사진=뉴시스/AP)
오바마 대통령의 이 같은 행보가 미국 노동계의 주목을 받는 이유는 미국이 선진국 중에서는 유일하게 유급 병가나 출산·육아 휴가를 법으로 보장하지 않은 나라였기 때문이다. 본인과 가족의 건강을 돌보기 위한 병가에 관해 규정한 것은 1993년 제정된 '가족·의료휴가법(FMLA)'이 유일하다. 근로자 자신이나 배우자, 자녀 등 가족에게 심각한 의료적 사유가 발생했을 경우 최대 12주의 무급 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출산과 육아를 위한 휴가도 모두 이에 준했다. 소득을 포기하는 대가로 얻는 휴가인 만큼 생계와도 직결돼 사용이 쉬운 것이 아니지만 그마저도 전체 근로자의 60% 정도만 혜택을 봤다. 50인 이하의 민간 기업이나 파트타임 근로자는 적용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5인 이상 사업장의 모든 근로자들에게 최대 7일간의 유급 병가를 보장한다는 내용의 '건강한 가족법'이 시행될 경우 현재 4400만 명에 달하는 고용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의 근로 환경이 조금이나마 개선될 것으로 기대된다.
◇선진국 꼴찌 미국, 중산층 살리기로 접근
오바마 행정부는 유급 병가·출산 휴가의 확대를 중산층 살리기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열심히 일한 만큼 보상을 받고 모든 사람에게 균등한 성공의 기회가 보장돼야 한다는 것이 중산층 살리기 정책의 목적인데, 유급 휴가야 말로 그 초석이라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저소득층이나 저학력자 등 사회 취약 계층으로 분류되는 사람일 수록 유급 휴가에 접근이 어려운 것으로 나타났다. 미 노동부가 지난 2011년 진행한 시간사용조사에 따르면 전체 조사대상 근로자의 평균 유급 휴가 사용률이 59%였던 데 반해 고졸 이하의 저학력자의 사용률은 35%로 나타났다. 소득별로는 주당 0~540달러(약 63만원)를 버는 사람들의 50%가 유급 휴가를 쓸 수 있었던 반면 1230달러(약 142만원)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사람은 83%가 유급 휴가를 사용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인종별로는 백인이 62%로 가장 높았고 히스패닉이 43%로 가장 낮았다.
다른 나라들보다 경제력에서는 앞섰지만 유급 휴가 사용 환경은 뒤떨어졌다는 점도 오바마 행정부의 추진력을 높인 배경이 됐다. 1990~2010년 미국의 여성 사회참여율은 6위에서 17위로 하락했다. 정체된 미국에 반해 다른 나라의 진보가 빚은 결과다. 실제로 미국과 가장 인접한 국가인 캐나다의 경우 최소 15주의 유급 출산휴가를 보장하고 소득이 비슷한 부부의 경우 총 37주의 육아 휴직을 나눠 사용할 수 있다. 6세 미만의 자녀가 있는 가정에는 매달 100달러의 보조금도 제공된다. 영국은 최대 52주의 출산휴가가 보장되는데, 이 중 39주까지는 유급이다. 개발도상국으로 분류되는 브라질도 출산 후 여성들에게 120간의 휴가를 제공하고 이 기간 동안 월급의 100%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해 준다. 이 같은 상황은 작년 9월 호주 맬버른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노동장관 회의에 참석한 토마스 페레스 미 노동부장관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는 회의 직후 허핑턴포스트에 기고한 글을 통해 "선진국 중에서 어떠한 형태로든 법적으로 유급 휴가를 보장하지 않는 국가가 미국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소회를 전했다.
이 회의에서 페레스 장관이 깨달은 바는 경제 성장과 가족 친화적 일자리 정책이 결코 상충되는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생산적인 근로자와 참여적인 부모가 되는 것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며 유급 휴가나 아동 돌봄과 같은 정책들은 여성 노동력 증가에 기여한 다는 것이다.
◇돌아올 곳 있는 여성, 경제 성장에도 긍정적
유급 병가와 출산휴가 도입에 미온적 입장인 사람들은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는 것을 이유로 든다. 그러나 페레스 장관을 비롯해 이를 추진하려는 사람들은 유급 휴가에 대한 사회적 비용 발생은 불가피한 것이며 근로자, 고용주, 국가의 주머니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미국 대통령실 산하 경제자문위원회(CEA)가 발간한 보고서는 한 연구 결과를 인용해 "유급 휴가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질 수록 다시 회사로 돌아오는 엄마들이 증가했다"고 밝혔다. 법적으로 일자리만 보장된다면 출산휴가는 장기적으로 여성들의 임금과 고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기업의 입장에서 보자면 적지 않은 자원이 투입된 인력이 유실되는 것을 막아준다. 조사 결과 유급 출산·육아 휴가를 제공하는 기업의 여성 근로자 근속 연수가 상대적으로 길고 이직률도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성별간 격차 해소에도 기여를 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 점에서 유급 병가와 가족휴가의 법적 가이드라인을 만든지 10년이 넘은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캘리포니아주는 미국 지방 정부 중에서는 처음으로 지난 2002년 유급 가족휴가제를 입법, 2004년부터 시행했다. 기존의 장애인 지원금 혜택을 확대해 자녀, 부모, 등록된 동성 배우자를 간병 또는 자녀 출산을 위해 직장을 쉬는 경우 일정한 소득을 보장키로 한 것이다. 출산 여성은 출산 전 2~4주, 출산 후 2주까지 쉴 수 있고 통상 임금의 55%를 보장받는다. 2014년 기준 주당 최고 1076달러(약 125만원)까지 지원받을 수 있다. 과거 12개월간 최소 300달러 이상의 근로 소득이 있어야 하며 소득세를 주 정부에 장애보험료로 납부했다는 기록이 최소 요구조건이다. 유급 가족휴가제도 도입 10주년을 맞아 캘리포니아주 고용·발전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신청 건수는 첫 해 15만 건에서 2012회계연도 21만6000건으로 43.4%, 지급 총액은 2억9500만달러에서 5억5400만달러로 87.5%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경제연구소의 조사에서는 유급 휴가 도입을 기준으로 평균 휴가 기간이 7.8주에서 10.2주로 2.4주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더 나아가 전문가들은 유급 휴가의 도입이 단순한 경제성 평가를 넘어 기본적인 인간 존엄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할 문제라고 지적한다. 집에 홀로 남아있는 아픈 아이나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해 있는 노쇄한 부모를 월급과 겨루게하는 말도 안되는 선택을 지속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얘기다. 국가가 나서 개인의 일과 가정의 균형을 맞춰줘야 한다는 당위성이 높아지는 배경이다.
김진양 기자 jinyangkim@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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