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병이라도 치료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처방은 천차만별이다. 한의사는 아토피 환자에게 몸 속 열을 낮추고 독소를 제거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조언하고 피부과 의사는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음식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먼저라고 진단한다. 양쪽 다 일리 있는 처방이다. 한의사는 동양의학의 가르침 대로, 피부과 의사는 서양의학에 따른 접근법을 취했을 뿐이다. 환자는 자신에게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처방전을 따르거나, 둘을 병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간과 자금이 충분치 않을 때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서게 된다. 경기침체란 병에 걸린 영국도 같은 고민을 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영국 정부는 긴축정책을 시행할 것인지를 놓고 엄청난 내홍을 겪었다. 긴축은 지금도 병든 국가 경제를 낫게 하는 묘약이란 찬사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주범이란 비난을 동시에 받고 있다.
◇빈부격차 키우는 긴축정책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영국 정부는 양자택일의 기로에 섰다. 경기침체란 병에 어떠한 처방을 내려야 할지에 대한 주장이 엇갈렸기 때문이다. 특히 긴축정책을 시행할 것인지를 놓고 거센 논쟁이 일었다. 긴축 정책은 병든 국가 경제를 낫게 하는 묘약이란 찬사와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주범이란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최근에도 재집권에 성공한 보수당 정부가 긴축기조를 이어갈 것이라고 천명하면서다 긴축 논쟁은 재부각됐다.
긴축을 반대하는 측은 빈부 격차를 문제 삼는다. 지난 5년간 긴축이 진행되면서 사회복지 예산이 대폭 감소해 노인과 아동, 여성 등 소수자의 생활고가 커졌다는 지적이다. 침체된 경제를 정상화하는 대가로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포기했다는 비난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영국인들은 캐머런 행정부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 지난 2010년 데이비드 캐머런 보수당 당수는 총리 취임 직후 연설에서 “어깨가 넓은 사람들이 더 큰 짐을 지는 것이 맞다”며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강조한 바 있다. 2008년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침체된 영국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는 기득권층이 솔선수범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상황은 반대로 흘러갔다. 경제 회복을 위한 짐은 고스란히 서민들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실제로 파이낸셜타임즈(FT)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 2010년부터 지금까지 핵심 서비스를 받을 수 없게 된 연금수령 인구는 15만명에 이르렀다. 같은 기간 아동보호 관련 예산은 8%가량 줄었다. 중앙정부의 긴축 드라이브로 지방정부 예산도 덩달아 180억파운드나 깎였다. FT는 이런 흐름은 당분간 이어져 오는 2020년까지 950억파운드가 추가로 삭감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연히 소수자 인권이 악화될 위기에 처했다. 복지개혁센터(The Centre for Welfare Reform)는 지난해 말 보고서를 통해 오는 2016년까지 저소득층 사회복지 예산이 연간 기준으로 인당 2744파운드나 깎일 것이란 암울한 전망을 내놨다. 장애우와 사회복지 대상자들에 대한 지원금은 각각 4600파운드, 6409파운드씩 급감할 것으로 예상됐다.
복지 예산 감축은 부의 쏠림 현상이란 구조적인 문제를 낳았다. 크레딧스위스에 따르면 영국은 지난 10년간 주요 7개국 중 소득 불평등 정도가 심화된 유일한 국가다. 지난 2000년부터 작년 말까지 상위 10%가 지닌 부는 51.5%에서 54.1%로 점프했다. 2000년 당시에는 억만장자 수가 8명에 그쳤는데, 지금은 44명이나 된다.
◇긴축 반대 시위 영국 전역에서 일어나
실제 수치가 증명하듯 부의 편중 현상이 심화된 데다 서민들의 생활고가 커지자 영국 곳곳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허핑턴포스트에 따르면 지난달 20일 런던과 글라스고, 리버풀, 브리스톨 등 영국 전역에서는 25만명이 모여 긴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캐머런 정부의 퇴진과 긴축 철회를 요구했다. 그런데도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긴축 기조를 이어가겠다는 입장을 되풀이했다. 오히려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은 각 정부부처에 예산을 최고 40%까지 삭감하는 계획안을 제출하라고 압박하며 긴축의 고삐를 더 움켜쥐었다. 오는 2019~2020년 회계연도까지 정부부처 지출을 200억파운드 삭감한다는 목표를 이루기 위함이다. 부족한 세수는 탈세 억제로 충당할 방침이다.
긴축에 반대하는 이들은 분통을 터뜨렸고 전문가들은 현실성 없는 계획이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토니 트래버즈 런던정경대학 교수는 "독일이나 프랑스 수준의 사회복지를 미국 수준의 세금 수입만으로 진행하겠다는 뜻인데, 현 구조라면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평가했다.
사실 시위가 벌어지기 한참 전부터 전문가들은 긴축이 영국 경제에 재앙을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해왔다. 그 대표주자는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다. 폴 크루그먼은 큰 정부를 추구하는 신케인즈학파 학자답게 줄기차게 긴축에 반대해 왔다. 정부 지출을 늘려야 일자리가 생겨나고 가계 구매력도 커져 리세션(불황) 국면을 벗어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의 주장대로라면 영국 정부는 반대쪽 길로 가고 있는 셈이다. 물론 크루그먼도 지출 감축으로 재정 건전성을 높인다는 영국 정부의 목표에는 동의한다. 다만 그가 문제 삼는 것은 국채 발행 비용이 적은데도 굳이 사회복지 지출을 줄여서 민간 경제를 위축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자본 조달 비용만 낮다면 부채 규모는 큰 문제가 아니다. 재정 지출로 적자 규모가 커지긴 하겠지만, 그 대가로 민간 수요를 늘려 침체된 기업을 살릴 수 있고 신규 채용도 끌어낼 수 있다. 지출로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다는 논리다.
미국의 석학으로 손꼽히는 노암 촘스키도 크루그먼과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리세션 상태에서 긴축을 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며 “긴축은 경제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긴축에 대한 역반응으로 그리스 황금새벽당같은 극진주의 우파가 큰 인기를 얻을 수 있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긴축 찬성측 "부채 줄여야 정책 지속 가능"
선거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모든 사람이 긴축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캐머런 총리가 재집권에 성공했다는 것은 그가 주도한 긴축정책이 많은 국민의 동의를 얻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지난 5월7일에 실시된 영국 총선 결과를 보면, 캐머런의 보수당은 37%의 득표율로 제1야당인 노동당(30%)과 영국독립당(13%)을 제치고 하원 내 과반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긴축을 둘러싼 이견이 분분했음에도 보수당이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캐머런 임기 5년 동안 경제가 정상 궤도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영국은 긴축재정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을 뛰어넘는 성장세를 구가했다. 실제로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영국의 국내총생산(GDP)은 2.8% 증가해 2.4% 성장한 미국을 앞질렀다.
단순히 GDP 수치만 증가한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도 뚜렷한 회복세를 나타냈다. 영국의 지난 2010년 대비 2014년 총고용 증가율은 5.2%로 유럽연합(EU) 주요국 중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이런 결과에 고무된 장 클로드 트리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긴축이 불황을 가져온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라며 "긴축 정책은 경제 회복을 도우면 도왔지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돈을 적게 쓰는데 어떻게 경제가 살아날 수 있을까란 의문이 들 수 있지만, 긴축 찬성론자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그런 일이 가능할 법 하다. 이들은 국채 발행 빈도수와 규모가 늘어나면 조달 금리가 올라 투자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또 국가부채가 불어날수록 정책의 지속가능성이 떨어지고 국가가 부도를 맞게 될 확률이 높아지는 것도 문제로 꼽힌다. 이러 이유로 긴축 찬성 측은 반대 진영의 감세 철회 요구를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인 주장으로 치부한다. 세상 물정을 모른다는 것이다.
긴축 반대 진영에 폴 크루그먼이 있다면, 찬성 쪽엔 니얼 퍼거슨 하버드대 교수가 버티고 서 있다. 니얼 퍼거슨은 지난 5월 파이낸셜타임즈(FT) 기고문을 통해 큰정부 기조에 동의했던 학자들을 싸잡아서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영국 보수당의 승리는 긴축 정책을 끝까지 밀어붙인 조지 오스본 재무장관 덕분"이라며 "긴축이 처참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주장했던 케인즈주의 경제학자들은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긴축정책의 이론적 근거는 지난 2010년 라인하트와 로고프가 발표한 ‘부채 시대의 성장’에서 찾을 수 있다. 둘은 국가부채가 GDP의 90%를 넘으면 경제성장률이 급격하게 하락한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실제 경제와 맞지 않는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 둘의 논문은 독일처럼 긴축을 강조하는 이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지금도 90% 기준선은 긴축의 당위성을 설명할 때 단골로 쓰인다. 최근에는 EU 당국이 그리스와 포르투갈, 스페인 등 재정 위기에 처한 국가들에 긴축을 주문할 때 이 기준선을 사용했다.
윤석진 기자 ddagu@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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