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개념들은, 겉보기에 간단히 정의되면서도 실은 그에 대한 수많은 담론을 내재하고 있다. 문외한들의 입장에서 쉬이 접근할 수 없는 전문분야의 무엇이 아닌, 대다수 사람들의 삶에 밀착해 있는 보편적인 개념들의 경우다.
이러한 경우, 우리는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복잡성을 어느 정도 인지하면서도 그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럴 기회가 자주 있지도 않을 뿐 더러, 그 결론에 도달하는 일 또한 쉽지가 않기 때문이다.
헌데 말했다시피 이러한 개념들은 일반 삶에 밀착해 있기 때문에, 그것의 복잡함을 기피하려는 의식은 해당 개념이 우리 사회에 작용함에 있어 교묘한 오류를 일으키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서 여러 의미로 혼용되곤 하는, ‘애국심’의 경우가 꼭 그렇다.
애국심이란 개념은 일반적으로 국가나 민족에 대한 소속감, 자부심, 혹은 그로부터 파생되는 행동력 등을 모두 포용할 것인데, 이러한 요소들이 발현되거나 작용하는 방식은 경우에 따라 판이하게 다르다.
예를 들어, 정치적 입장에 따라 애국의 방식에 대한 차이가 확연할 수 있다. 대체로 보수 진영에서 강조하는 ‘애국심’을 반대의 입장에선 경계하는 등의 ‘입장 차이’를 우린 몇 번이고 보아왔다. 영화 <명량>이나 <국제시장>을 둘러싼 논란들이 그랬고, ‘안보의식’, ‘성장과 분배’ 등에 관한 오래된 논의들에서도 애국 이야기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에 그치지 않는다. 스포츠, 예술 등의 문화 분야에 있어서 애국심은 종종 정치적 입장을 넘어선 당위적 정신으로 여겨지는데, 인터넷상에선 오히려 ‘애국’을 강조하는 보수적 커뮤니티에서 그러한 당위적 애국심을 조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당장 몇 해 전만 해도 ‘국뽕’이라는 유행어가 보수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인터넷을 휩쓴 적이 있다.
이처럼 애국심이란 개념은, 일관적으로 추구해야 할 무언가 보다는 입장이나 상황에 따라 그에 대한 생각이 충분히 달라질 수 있는 개념으로서 사회에 작용해 왔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앞서 언급했듯 혼선으로 인한 오류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자연스레 형성되어야 할 정신이, 무엇이 애국이며 무엇이 매국이냐라는 논쟁의 도구로 사용되면서 진영논리에 편입되었다. 특히 최근에는 ‘애국보수’라는 용어가 새로이 대두되며 ‘애국심’이 일부 보수진영의 전유물로 자리 잡는 경향이 더욱 짙어지고 있다.
국가 공동체가 공유하는 소속감, 즉 본질적인 애국심에 대한 가치를 회의하는 시선 또한 물론 존재하지만, 국가 내 대부분의 구성원들은 어떠한 형태로든 일말의 애국심을 지니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분명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과 같은 오류가 점차 심화된다면, 궁극적으론 혼잡한 담론들 이전에 존재할 애국심의 본질적 가치조차 퇴색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구성원들의 자존감, 연대의식, 그를 통한 사회 교정 의지조차 약화시킬 여지가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구성원의 자발적 의지로 자연스레 형성되는 것이 아닌 특정 이해관계를 위해 추구되어야 할 애국심은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 결국 애국심의 궁극적 의미는 더 나은 사회조건을 통해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서로에 대한 애정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를 위한 발판조차 마련치 못하는 상황에서 ‘가져야만 한다’고 외치는 애국심은 허망할 뿐이다.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 소속 대학생 기자단 ‘YeSS’가 지난해 2.1지속가능연구소와 함께 진행한 <대한민국 대학생 가치조사(2014)>는 이 단순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조사 문항 중 애국심과 관련지을 수 있는 세 문항에서, 앞서 말한 사회조건과 직결되는 ‘경제수준’에 의한 분류는 가장 두드러지고 일관된 수치를 보였다.
◇자료=바람아시아
먼저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낀다’는 문항에서, ‘그렇다’는 경제수준 하, 중하, 중, 중상, 상에 따라 38.3, 41.2, 44.9, 48.8, 59.5로 달라졌다. 두 번째로 ‘나는 기회가 된다면 다른 나라로 이민 가고 싶다’는 문항에서도 ‘그렇지 않다’는 답안은 같은 순서에 따라 31.9, 29.5, 33.4, 34.5, 36.9로 비교적 일관된 수치를 보였다.
마지막으로 ‘나는 전쟁이 일어나면 기꺼이 나가 싸울 것이다’라는 문항에선 ‘그렇다’라는 답안이 역시 같은 순서로 30.3, 29.1, 36.4, 35.1, 38.9로 파악되며 거의 비슷한 맥락을 공유했다. 단순하게 보았을 때 경제수준 ‘하’와 ‘상’은 모든 문항에서 확연한 차이를 냈다
사실 당연한 결과다. 현재의 여건에 불만족, 혹은 불합리를 느끼는 집단에게 소속 국가에 대한 자부심이나 소속감, 방위의식 따위를 요구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 또한 위의 세 문항이 응답자가 가진 애국심의 절대적 기준 또한 아니다.
그러나 요는 ‘경제적 수준’이라는 사회적 조건이 부분적일지라도 애국심의 작용에 분명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 때문에 많은 이들이 주장하는 ‘애국심 고취’는 결국 그 조건을 얼마나 더 합당한 모양새로 만드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본질적인 애국심의 고취, 즉 사회를 아우르는 애정관계의 공유에 있어서, 애국심에 얽혀있는 현재의 혼선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이해관계에 따라 요구되는 애국심이, 일종의 압박으로서 구성원들에게 전가될 때 그들은 결국 그들 자신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가져온 나름의 애국심까지도 부정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 본질을 생각해 볼 때 분명 가치 있는 정신인 ‘애국심’이 일부가 주장하는 그들만의 애국심과 이중 의미의 오류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이 기사는 <지속가능 청년협동조합 바람>의 대학생 기자단 <지속가능사회를 위한 젊은 기업가들(YeSS)>에서 산출하였습니다. 뉴스토마토 <Young & Trend>섹션과 YeSS의 웹진 <지속가능 바람>(www.baram.asia)에 함께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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