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키코판매 은행인 SC제일은행(現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에 대한 검찰의 수사결과 보고서를 공개한 가운데 검찰이 내린 '혐의 없음' 처분을 두고 논란이 재점화 되고 있다.
공대위가 8일 공개한 검찰의 수사결과 보고서를 보면 은행의 사기 판매를 의심할 만한 정황이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2008년 3월 환율이 본격적으로 치솟을 때조차도 은행 딜러들은 기업들에게 환율상승세와 지속가능성을 숨기고 상품을 보유할 것을 권고했다. 또 기업들과의 관계에서 '甲'의 위치에 있는 심사역들에게는 더 많은 기업들이 키코(KIKO)상품 계약을 하도록 독려했다.
◇법조계 "사기의 미필적 고의 넉넉히 인정"
키코의 상품 특성상 환율이 일정기준을 넘어가면 엄청난 손실이 예상되기 때문에 환율상승은 기업에게는 독이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딜러로서는 최소한 새로운 키코 가입자가 발생하는 것은 막아야 했다.
이를 두고 법조계에서는 "최소한 사기의 미필적 고의 정도는 넉넉히 인정된다"고 평가하고 있다.
공대위가 2010년 2월25일 키코를 판매한 11개 은행들을 특경가법상 사기 혐의로 고발했을 때만해도 검찰은 수사의지가 있었다.
고발 닷새 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 2부가 수사에 본격적으로 착수하는가 하면 그해 7월에는 김준규 당시 검찰총장이 중소기업중앙회를 방문해 키코 사건에 대한 간담회를 가졌다. 또 같은 해 9월에는 금융감독원을 압수수색해 압수물 등을 토대로 은행들에 대한 조사결과를 분석했다.
그러나 이후 수사는 꼬이기 시작했다. 법원이 검찰이 신청한 11개 은행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모조리 기각하면서다.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계약체결과 수사의 필요성 소명이 부족하다는 게 이유였다.
◇법원 "키코는 자율 계약" 은행 압수수색 영장 기각
수사팀은 황당해 했다. 법조계에서도 "사기범죄 자체가 자유로운 의사에 의해 체결된 계약에서 시작된다"며 "법원의 영장 기각사유에 따르면 사기죄는 처벌할 수 없게 된다"는 비판이 비등했다.
결국 법원의 석연찮은 영장기각은 당시 키코 피해 관련 민사사건 판결선고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리하게 영장을 기각한 것이라는 의혹까지 불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사팀은 미국의 증권·파생상품 시장을 관리하는 기관인 미국 CFTC(상품선물거래위원회)와 SEC(미국증권거래위원회)가 모두 키코상품의 구조와 판매과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린 문건을 입수하는 등 수사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이들 문건은 주미한국대사관에 파견되어 있는 검찰 법무협력관이 2010년 12월21일에 워싱턴 D.C 소재 CFTC와 2011년 1월11일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SEC를 직접 방문해 요청한 것으로, 당시 서울중앙지검장-검찰총장-법무부장관 등을 거쳐 주미 한국 대사관을 경유한 것이었다.
그러나 암초는 또 있었다. 수사는 이듬해 한상대 전 검찰총장이 당시 서울중앙지검장으로 취임하면서 본격적인 난기류를 만났다.
2011년 2월1일 취임한 한 지검장은 설 연휴까지 끼어 진행된 업무보고 첫날 키코사건 담당검사로부터 하루 종일 키코 수사 내용과 관련된 PT(프리젠테이션)를 들었다.
첫날 여러 현안을 제치고 키코 수사 상황을 점검한 것도 특이하지만 차장급과 부장급만 참석하는 지검장 업무보고에 평검사를 배석시킨 것은 이례적이었다.
◇한상대 지검장 "은행 다 죽일 일 있나. 빨리 끝내라"
김원섭 전 키코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공대위)장은 이 배경에 대해 "한 전 총장이 업무보고를 받으면서, 키코사건 담당 수사팀에 '은행 다 죽일 일 있느냐. 키코 수사부터 마무리 지으라'고 직접 지시했다는 이야기를 수사팀 관계자로부터 전해 들었다"고 밝혔다.
이 일이 있은 뒤 같은 달 예정됐던 '키코 사건' 처분 결과 브리핑은 한참 뒤로 미뤄졌고, 키코 사건을 주도적으로 수사해온 박성재 검사는 공판부로 전보조치 된 뒤 사표를 제출했다.
이후 '키코 사기사건' 수사는 지지부진하다가 결국 그해 7월19일 무혐의 처분됐다. 공대위 등이 항고했으나 서울고검 역시 2012년 2월 항고를 기각했다.
이 바람에 미국 CFTC(상품선물거래위원회)와 SEC(미국증권거래위원회)가 발급한 문건은 빛 한번 보지 못하고 쓸모가 없게 됐다.
'키코 사건' 수사는 그해 국회의 대검 국정감사에서 야당의원들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2012년 10월18일 열린 대검 국감에는 키코상품 전문가인 박선종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겸임 교수가 증인으로 나와 '키코 사건' 수사검사였던 박성재 변호사로부터 "부장검사가 동의를 해주면 기소할 수 있는데, 윗분들이 아직 반대하고 있다"는 취지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증언했다.
◇국감장 증언 "김앤장 로비 심해..검사 맘대로 바꿔"
그는 또 "은행 측 사건 수임을 했던 김앤장의 로비가 심하다. 담당검사를 마음대로 바꾸는 느낌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이어 "은행이 이익을 많이 얻는다는 사실을 중소기업에서 알지 못하도록 주의하라"는 은행 본점과 지점 직원들의 대화가 담긴 녹취록을 들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이같이 여러 의혹이 제기된 키코 사건이 2012년 한 해를 뜨겁게 달궜지만 검찰의 수사가 종료된 상태에서 더 이상의 동력은 얻지 못했다. 이후 법원의 키코 피해배상에 대한 판결이 이어졌고 지난해 9월26일 대법원마저 사실상 은행측 손을 들어줬다.
대법원 판결 후 법조계에서는 무엇보다 당시 검찰의 수사를 아쉬워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수사를 끝까지 했더라면 더 많은 사실이 밝혀졌을 것이고 하급심을 비롯한 대법원도 보다 넓은 시각으로 사건을 봤을 거라는 분석이다.
이런 가운데 공대위가 이날 수사결과보고서를 공개하면서 은행들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움직임이 얼마나 반향을 일으킬지는 미지수다. 공대위측 자문을 맡고 있는 한 변호사는 "검찰의 의지에 달려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끝나버린 수사를 재개하기란 매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공대위를 비롯한 키코 피해 기업들은 다시 시작할 기세다. 그들은 환율상승을 확신하고도 키코판매를 권유한 제일은행 측 딜러와 제일은행 등을 특경가법상 사기 등의 혐의로 고발 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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