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준호기자] 모든 기업 CEO의 가장 큰 고민은 선택일 것이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남들이 보지 못하는 흐름을 발견해야 한다. 만약 맞다 싶으면 조직원 99%가 반대하더라도 결정해야 한다. 이것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CEO들만이 혁신을 추구하고 생존을 모색할 수 있다. 어떻게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을까? 이 시대에 영감을 주는 기업가들의 선택 순간을 살펴보고, 우리 벤처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알아본다.[편집자]
20대 후반에서 30대 중반 연령대라면 어렸을 적에 레고 장난감을 한 번쯤은 조립해 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레고는 장난감의 대명사지만, 지난 2003~2004년에는 파산 직전까지 몰리는 위기를 맞은 적이 있습니다. 거대해진 유통망, 해리 포터와 같은 타사 프렌차이즈에 의존한 제품군의 인기하락 등 경영 부실과 더불어 어린이들이 장난감보다는 게임기를 선호하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레고가 이 같은 위기를 극복하고 부활한 것은 외르겐 비 크누드스토르프(47) CEO가 지휘봉을 잡았을 때입니다. 파산의 늪에서 레고를 건져내기 위해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시행하고, 인건비가 싼 동유럽으로 공장을 옮겼습니다.
이와 동시에 외르겐은 레고의 고객층을 어린이로 한정시키지 않고 어른들로 넓혀가는 시도를 하고, 이는 레고가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진=레고 공식 홈페이지)
<스타트업 성공 7법칙(한성철, 김진영 공저)>을 보면, 레고는 지난 2004년 온라인상에서 스스로 레고를 설계할 수 있는 ‘레고 디지털 디자이너’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이 프로젝트로 인해 레고를 잊고 있던 어른들이 다시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레고의 어른팬들(AFOL, Adult Fan of LEGO)'의 커뮤니티가 생기기 시작했고, 구매력을 지닌 어른들이 레고를 구매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 내에서도 ‘레고 파산’, ‘레고 지름신’이라는 용어가 쓰이고 있을 정도입니다.
여기에 지난 2005년 발생한 ‘마인드스톰스(Mindstorms)’ 해킹사건과 이에 대한 레고의 대응은, 레고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마인드스톰스는 원래 1998년에 MIT대학과 공동으로 출시한 로봇형태의 레고입니다.
워낙 매니악한 장난감으로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난 2005년 이 제품의 구동 소프트웨어가 해킹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외르겐 CEO는 해킹범을 고발하는 대신, 아예 프로그래밍 소스를 공개했고, 전 세계 많은 엔지니어들이 열광적으로 마인드스톰스의 구동 프로그램을 발전시키는 데 기꺼이 무급으로 참여했습니다.
이들은 레고의 어른팬들(AFOL)을 자처하며 레고를 만드는 일에 자부심을 가졌으며, 레고도 이들 중 100여명을 선발해 가상개발팀으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레딧(Reddit)은 현재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소셜 뉴스&커뮤니티 플래폼이다(사진=레딧 레고 AFOL 커뮤니티)
이 같은 레고의 선택은 크라우드소싱(공개모집)의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히고 있는데요.크라우드소싱이란 대중(crowd)와 외부자원활용(outsourcing)의 합성어로 제품개발에 전문가는 물론 일반 대중들이 참여해 제품을 발전시키는 일입니다.
최근에는 미국의 많은 스타트업 기업들이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기 위해 제품소스를 공개하고, 아이디어를 공유하는 일이 일반화돼 있지만, 레고는 이 같은 혁신을 지난 2005년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같은 레고의 위기 극복 방식은 ‘장난감은 아이들의 것’이라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버리면서 시작됐습니다.
최근 스타트업들을 보면 ‘우리 서비스는 대학생들만을 위한 것이야’, ‘이건 젊은 직장인들에게 먹히는 아이템이야’라고 섣불리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서비스를 시작하고 나면 다양한 변수들이 등장하고 의외의 소비자가 나타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레고의 CEO는 마인드스톰스가 해킹당하자 이를 기회로 여겨, 단숨에 전 세계에서 가장 첨단 기술을 다루는 엔지니어들을 자신들의 고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지난 8월에 출시한 마인드스톰스 3세대는 약 40만원의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실리콘밸리의 마니아 등 전세계의 ‘어른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만약 일반적인 해킹 사건으로 처리했다면, 레고는 아직도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이나 만드는 회사로 남아 있을지 모릅니다.
스타트업 운영에 등장하는 변수를 누군가는 ‘걸림돌’로 생각하고, 누군가는 ‘가능성’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이 차이가 지금 운영하고 있는 스타트업의 10년 후의 미래를 바꿔 놓을 수도 있습니다.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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