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극우화를 이끌고 있는 아베 신조 총리는 지난 4월 "침략이라는 정의는 학계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정해지지 않았다"면서 "국가간의 관계에서 어느 쪽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말했다.
그 조금 앞서 박근혜 정부 초대 장관 후보 청문회에서 대다수 후보자들은 5.16의 쿠데타 여부를 묻는 질문에 하나같이 답변을 피했다.
그들이 내놓은 대답은 대략 "5.16이 쿠데타인가를 묻는 질문에는 답하기 곤란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그에 대해 아직 입장이 갈리는 상황에 있다"는 것이었다.
과거 인식이 이처럼 왜곡되고 얇은 것은 나라가 달라도 양국간 우익들은 똑같은 것 같다.
침략이 침략이 아닐수 있고 쿠데타가 쿠데타가 아닐 수 있다는 대답은 명백한 범죄행위도 때에 따라서, 범죄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범죄가 아니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일본이 이렇게 잘못된 역사인식을 가진채 식민 지배를 미화하고 조선과 대한민국의 영토를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전쟁범죄에 대해서 사과와 피해보상을 외면한다면 일본은 일본에 의해 피해를 입은 국가들과는 단연코 미래를 같이 하기 어렵다.
역사 인식 문제를 피하기 위해 일본이 때때로 꺼내드는 논리는 과거는 잊고 미래로 나가자는 투의 주장들이다. 한일 공동번영이니 발전적 미래관계니 하는 말들이 그런 류다.
그러나 제대로 된 역사인식이 없는 상황에서 이런 말들 뿐만으로는 양국관계가 한발짝도 나갈 수 없다.
최근 한일전 축구에서 나온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붉은 악마의 플래카드는 이런 이유로 엄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과와 반성없이 가해자와 손을 잡으라고 하는 것은 또다른 역사왜곡이며 피해자에 대한 2차범죄에 가깝다. 그리고 이는 가해자가 할수 있는 말도 아니다.
우리 정치권도 늘 '국민대통합'이 최대 화두다.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는 비밀처럼 사실 우리나라는 이미 완벽하게 두개로 쪼개져 있다.
여당을 비롯한 보수 우익세력은 자기편과 종북으로 세상이 나뉘어 있고 진보쪽은 독재권력 및 그 추종자와 민주주의자로 갈려 있다고 본다.
박근혜 정부 들어 국민통합위원회라는 기구까지 만들면서 뭘 좀 하려는 것처럼 열을 올리고 있지만 청와대와 여당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보수세력은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 상당수를 이미 북한에 동조하는 종북 세력으로 보고 있다.
국정원 심리전단의 인터넷 활동에 따르면 대선 과정에서 이미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은 북한 김정일의 하수인이 됐고 문재인 후보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 박원순 시장과 안철수 의원를 비롯해 진보적 정치인과 학자, 전문가, 심지어 연예인까지도 종북이 된지 오래다.
최근엔 5.18 항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필두로 전라도민 전체가 통째로 종북이 되기도 했다.
국정원의 이러한 여론활동을 새누리당은 대북 심리전이라며 없앨게 아니라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인식을 갖고 있으면서 통합을 말하는 건 사기에 가깝다. 종북과 통합을 하자는 건 아닐테고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 대다수 사람들을 종북으로 보고 있으면서 과연 누구와 통합을 하자는 것인가.
군사정권과 보수정권은 늘상 정치적 반대세력을 북한과 연결시켜 왔다. 친북, 용공, 좌경, 종북 등 반대세력에 찍는 낙인의 이름도 다양하게 발전시켜 왔다.
총칼로 권력을 빼앗아 민주공화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을 멸망시킨 박정희 이후 대통령과 권력을 반대하는 것은 곧 친북이었고 적지않은 사람들이 죽는 것으로 그 댓가를 치렀다.
9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야 민주정부의 대통령들이 과거 정부의 독재와 민주주의 탄압 등 범죄행위에 대해 사과했지만 그것도 그때 뿐으로 이젠 새 정부 장관 후보자들이 쿠데타를 쿠데타라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시대로 돌아가게 됐다.
한일관계 발전을 위해 우선 일본이 제대로 된 역사 인식을 해야 하는 것처럼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는 과거 독재권력의 죄상과 최후를 분명히 기억하고 이를 통합의 전제로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일본이 침략을 미화하고 과거 범죄행위를 어떻게든 옹호하려는 것처럼, 한국 보수세력 역시 전직 대통령들을 종북으로 몰고 표를 주지 않은 사람들을 종북으로 모는 과거 권력의 행태가 반복된다면 과거 권력들의 최후 역시 반복될 수 밖에 없다.
(사진=한광범 기자)
과거로의 퇴행이 되풀이되는 사이 광화문과 서울시청 앞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는 그들이 말하는 '종북 세력'이 나날이 늘고 있다.
그들 눈에는 나라가 북한에 넘어가려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양식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나라가 제자리를 잡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으로 보인다.
이호석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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