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기철기자] 지난 7월1일 한-EU FTA가 발효된 뒤 석달이 지났지만 한국 법률시장은 조용하다. 한-EU FTA 발효를 앞두고 영국의 대형 로펌들이 서울상륙 계획을 앞 다퉈 발표하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법무부에 따르면, 9월30일 현재 국내에 등록을 신청한 유럽 로펌은 단 한곳도 없다. 이에 대해 법무부와 로펌업계에서는 몇가지 직접적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우선 국내 사무소 대표에게 요구되는 자격이 의외로 까다로울 수 있다는 제도적 문제다.
외국법자문사법 16조 1항 3호는 "외국법자문법률사무소 대표자가 될 외국법자문사는 외국 변호사 자격을 취득한 뒤 원자격국에서 3년 이상을 포함해 모두 7년 이상 법률사무를 수행한 경력이 있을 것"이라고 정하고 있다.
이 가운데 '원자격국에서 3년 이상'부분에 영국 등 유럽 로펌들이 부담을 가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원자격국에서 3년 이상'은 예컨대, 영국의 한 로펌이 한국에 들어와 사무소를 개설할 경우 한국사무소 대표자는 반드시 영국에서 3년 이상 변호사로 활동한 영국변호사임을 가리킨다.
때문에 유럽 로펌들이 가장 선호하는 인력은 유럽에서 변호사자격을 취득해 현지에서 변호사 생활을 한 한국계 변호사들이다. 외국법자문사로서의 법적 조건과 문화적 접근성 면에서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조건을 갖춘 변호사는 매우 드문 형편이다.
그렇다면 유럽 본토에 있는 유럽계 변호사가 와야 하는데 이 또한 쉽지가 않다는 게 여러 외국변호사들의 설명이다. 거주지, 아이들의 교육문제, 문화 등 현실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유럽계 로펌 사정에 밝은 한 국내 대형로펌 관계자는 "유럽에서는 한국을 아직까지 동남아 국가 수준으로 보는 시각도 없지 않다"며 "생활이나 자녀교육 문제 때문에 한국행을 꺼리는 변호사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런 문제 때문에 한국 사무소로 발령 나면 '좌천성 인사'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없지 않아 다른 로펌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유럽 로펌 입장에서도 자사 변호사들에게 한국행을 권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법무부 관계자도 "유럽 현지 변호사들은 한국 부임을 꺼리고, 한국계 변호사들은 홍콩이나 싱가폴 등지에서 주로 근무를 해 영국 현지 근무요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중요한 요인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한국의 매력에 대한 거품이 빠지고 있기 때문 아니냐는 분석도 조심스레 제기된다.
그동안 유럽과 미국 로펌들은 오랜 기간 동안 홍콩에 집중되어 왔다.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진출의 전초기지인 홍콩의 센트랄을, 로펌업계에서는 '국제 로펌의 아시아 1번가'로도 부르고 있다.
그만큼 많은 인프라와 네트웤이 홍콩에 집중되어 있다는 뜻으로, 홍콩에서의 원거리 공략이 충분한 한국을 직접 상륙할 필요가 있는지를 두고 유럽 로펌들이 신중한 저울질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럽 로펌들의 고객인 한국 기업들도 지리적, 시간적 측면에 대해서는 별다른 불편이 없다는 분위기다. 홍콩에 사무실을 둔 영국의 대형로펌을 자주 이용하는 한 대기업 법무팀 관계자는 "물론 한국에 와서 일을 돕는다면 좋겠지만, 현재로서도 업무 추진에 큰 지장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반대 견해도 있다. 국제업무를 많이 하는 국내 대형로펌의 한 변호사는 "유럽로펌에게 한국은 여전히 매력적인 미지의 땅"이라며 "이미 상당수의 유럽로펌이 사무실과 변호사 영입을 끝내 놓고 있는 만큼 유럽 현지 대표 선발 등 절차적인 문제가 해결되면 곧 유럽 로펌의 한국 상륙이 시작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한미-FTA가 발효되면 유럽 로펌의 상륙이 본격화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미국 로펌의 발이 묶여 있지만 한미-FTA가 발효돼 빗장이 풀리면 미국 로펌의 한국행이 쇄도할 것이라는 전망 때문이다. 그 때까지 득실을 재고 앉아 있다면 유럽 로펌은 한국 진출의 주도권을 미국로펌에게 빼앗기게 되기 때문이다.
외교통상부는 내년 1월 한미-FTA의 국회 비준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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