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박진석 기자] 74명의 사상자를 낸 대전 안전공업이 유가족과 처벌불원서를 작성하는 조건으로 합의한 걸로 확인됐습니다. 유가족들은 오랜 법적 갈등에 따른 고통이 커지는 걸 우려해 사 측과 합의를 한 걸로 알려집니다. 다만 대형 인명 피해를 일으킨 안전공업이 수사 단계에서부터 처벌불원서를 확보, 책임 회피에 나서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옵니다. 노동계에선 안전공업이 유가족과의 합의를 빌미로 대폭 감형을 받아낸 '아리셀 참사'의 전철을 밟아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의 실효성을 무력화할 수 있다고 우려합니다.
지난 3월26일 손주환 안전공업 대표이사가 대전시청에 마련된 안전공업 화재 희생자 합동분향소를 방문했다. (사진=뉴스토마토)
24일 <뉴스토마토> 취재를 종합하면, 지난 4월 말 안전공업 측은 유가족들과 피해 변제 등의 내용을 담은 합의를 마무리했습니다. 합의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유가족 측 법률대리인은 "합의 과정이 장기화되면 합의 조건이 나빠질 수 있고, 오랜 법적 갈등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의 고통이 커지게 돼 신속하게 합의를 마무리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안전공업, 4월 말 '처벌불원서 작성' 조건 유가족들과 합의 진행
문제는 합의 과정에서 안전공업 측이 유가족들에게 손주환 대표이사에 대한 처벌불원서 작성을 요구했고, 유가족들이 이에 동의했다는 점입니다. 처벌불원서는 피해자나 유가족이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표시하는 문서입니다. 재판에서 법적 구속력을 갖지는 않지만, 형량을 결정하는 과정에선 핵심적인 감경 참작 사유로 활용됩니다.
실제 처벌불원서가 감형 수단으로 작용한 선례는 차고 넘칩니다. '웹하드 카르텔'로 알려진 양진호 전 한국미래기술 회장은 지난 4월23일 수원지법에서 진행된 공익신고자보호법 위반 혐의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감형됐습니다. 재판부는 "고소 취하서 및 처벌불원서가 제출됐으며 피해자들이 손해를 배상받은 점 등을 참작했다"고 했습니다. 양 전 회장은 앞서 지난해 11월 1심에선 징역 1년을 선고받은 바 있습니다.
23명의 사망자를 낸 아리셀 참사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대재해처벌법 등 혐의를 받는 박순관 아리셀 대표는 지난해 9월 1심에서 징역 15년을 받았으나 올해 4월22일 수원고법에서 진행된 2심 재판에선 징역 4년으로 감형됐습니다. 감형 사유 중 하나는 합의였습니다. 당시 2심 재판부는 일부 유족의 엄벌 요구에도 불구하고 "피고인들은 사망한 피해자 유족들 전원 및 상해를 입은 피해자들과 모두 합의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지난달 9일 대전 대덕구 문평동 문평근린공원에 마련된 안전공업 희생자 합동분향소에서 유가족이 오열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처벌불원서로 중대재해처벌법 '취지 무색'…"면죄부 되면 안돼"
이에 노동계에선 안전공업 화재 사고 역시 향후 재판 과정에서 처벌불원서가 감경 사유로 활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우려합니다. 중대재해처벌법은 안전관리 의무를 강화하고 경영책임자에게 실질적인 책임을 물어 산업재해를 예방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처벌불원서가 책임에 대한 탈출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김용균재단 소속 조혜연 활동가는 "안전공업 재판이 진행되면 사 측은 처벌불원서를 재판부에 제출, 인명 피해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게 될 걸로 보인다"며 "처벌불원서와 합의를 이유로 사 측은 자신들의 할 도리를 다 했다고 주장하며, 자칫 숨진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취지에 맞게 작동하려면 사업주가 반성하고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사업주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손익찬 공동법률사무소 일과사람 변호사도 "처벌불원서가 제출되면 재판부는 이를 양형 사유로 참작하게 된다"면서 "특히 안전공업 화재 사건은 아직 재판에 넘어가기 전 수사 단계에 있는 상황인데, 미리 합의가 이뤄진 만큼 손 대표에게는 '면죄부'가 쥐어진 상황"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리셀 참사 재판에서 법원은 처벌불원서 때문에 박 대표의 형량을 3분의 2이상 줄인 선례가 있다"며 "안전공업 재판에서도 중대재해처벌법이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습니다.
유가족은 가족을 잃은 데 따른 생활고와 장기간 소송으로 인한 부담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 측은 이런 유가족들의 상황을 이용, 처벌불원서 작성을 요구하면서 유리하게 합의를 진행하게 됩니다.
익명을 요청한 노동계 변호사는 "유가족 입장에선 가족이 사고로 숨진 상황이고, 추후 재판 등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충분한 정보를 얻기도 힘든 상황이다. 재판 결과도 확신할 수 없다"며 "이런 상황에서 사 측은 사실상 협박성으로 처벌불원서을 빌미로 합의를 이어가게 돼 유가족은 처벌불원서를 작성하게 된다. 유가족을 실질적으로 지원하고 처벌불원서가 책임 면피용 탈출구가 되지 않도록 방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박진석 기자 ptba12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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