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코스피 9000 시대, 유상증자는 여전히 금기인가
2026-06-23 06:00:00 2026-06-23 06:00:00
코스피 지수가 9000포인트를 넘어섰다. 상법 개정을 통한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 도입, 정부의 자본시장 정상화 기조, 그리고 반도체 업종의 실적 폭발이 맞물리며 이룩한 성과다. 오랜 세월 자본시장을 짓눌러온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마침내 해소되는 기점으로 평가받는다. 부동산에 쏠려 있던 가계 자산이 주식시장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그러나 한 가지 불편한 사실을 짚지 않을 수 없다. 공개 주식시장의 가장 본질적인 경제적 기능은 기업이 성장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는 창구를 마련하는 것이다. 주주에게 돌아가는 배당과 시세차익은 그 창구가 원활히 작동한 결과물이지, 창구 그 자체는 아니다. 그런데 지금 한국 증시에서 유상증자는 금기에 가까운 언어가 되어버렸다. 기업이 신주 발행을 결의하는 순간 주가는 곤두박질치고, 개인투자자 게시판에는 경영진을 성토하는 목소리가 쏟아진다. 코스피 9000 시대를 맞은 지금, 주식시장 본연의 기능인 자금조달은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가. 그 답은 아직 '아니오'에 가깝다.
 
문제는 한국에서 그 불신이 특별히 깊어진 역사적 맥락에 있다. 서울대 김우진 교수 등이 2019년 <은행과 금융 저널>(Journal of Banking and Finance)에 발표한 연구는 2000년부터 2013년까지 한국 상장사의 유상증자 3184건을 전수 분석했다. 분석 결과는 충격적이다. 전체 유상증자의 3분의 1 이상이 성장을 위한 신규 투자가 아니라 기존 채무를 주식으로 교환하는 채무재조정 수단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유상증자 이전 기업들은 심각한 재무적 곤경에 처해 있었고, 조달된 자금은 R&D나 설비투자보다 부채 상환에 훨씬 더 많이 쓰였다. 요컨대, 한국 증시에서 유상증자는 미래를 여는 문이 아니라 재정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최후 수단으로 반복 활용되어 왔던 것이다. 주주들의 분노와 불신은 이 경험의 축적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감정 자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오명이 쌓인 것은 ‘유상증자’라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채무상환과 위기 모면’이라는 특정 목적의 유상증자였다는 점을 직시해야 한다. 싱가포르경영대학교 연구팀이 2016년 <매니지먼트 사이언스>(Management Science)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2003년 이후 미국 시장에서 유상증자 이후의 장기 저성과 현상은 사실상 소멸했다. 기관투자자의 성장, 거래비용 하락, 정보공시 규제 강화 등 시장 환경이 성숙해지면서, 최근의 유상증자는 시세차익 목적보다 실질적인 사업 확장과 성장 투자를 위해 결정되는 경향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유상증자를 둘러싼 낙인은 낙후된 시장 환경의 산물일 뿐, 자금조달 행위 자체에 내재된 본질적 결함이 아니다. 문제는 ‘목적과 환경’이었지, 유상증자 그 자체가 아니었다.
 
코스피가 9000을 돌파한 지금은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를 필두로 한 주요 기업들의 실적은 폭발적으로 개선되고 있고, 인공지능 공급망에서 한국의 지위는 전례 없이 높아졌다. 이런 국면에서 기업들이 성장 투자를 위한 자금을 주식시장에서 조달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고, 마땅히 장려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실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를 명시적으로 추가한 개정 상법의 시행은 소수주주 보호 측면에서 의미 있는 진전이다. 그러나 의도치 않은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다. 유상증자 결의 이후 발행가격 산정, 발행 시기, 배정 대상 선택 등 구체적인 집행 과정마다 소송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우려가 깊다. 이에 대한 법원의 판례가 아직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기업들은 성장성이 확실한 투자 프로젝트가 있더라도 유상증자를 결의하는 순간 예측하기 어려운 법적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안고 있다. 이 문제를 방치하면 주가는 오르는데 기업은 자금을 조달하지 못하는 기형적 증시가 고착된다. 투자자들은 시세차익을 즐기지만, 그 자본의 에너지가 기업의 실질적 성장 투자로 순환되지 못하는 구조적 동맥경화다.
 
이에 자본시장의 선순환을 위한 두 가지 제도 개선을 제안한다.
 
첫째, ‘투자 목적 유상증자’에 대한 세이프 하버(safe harbor) 명문화다. 미국 판례법이 발전시켜온 경영판단 원칙은 이사가 선의로, 충분한 정보를 바탕으로, 회사의 최선의 이익을 위해 행동했다면 법원은 그 경영판단의 결과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이는 기업인들이 소송 리스크를 과도하게 의식하지 않고 대담한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제도적 토대가 된다. 개정 상법이 이사의 주주 충실의무를 명시한 만큼, 이와 균형을 이루는 장치가 필요하다. 구체적으로는 자본시장법 등을 개정해 이사회가 독립적인 외부 재무 전문가의 공정성 평가를 거치고 투명한 자금 사용 계획을 공시하는 등 정당한 절차를 준수해 투자 목적의 유상증자를 결의한 경우에는 주주 충실의무 위반 소송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법제화해야 한다. 이는 소수주주 보호의 취지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당한 성장 투자’와 ‘기회주의적 부채 상환’을 명확히 구분해 전자는 보호하되 후자는 더욱 정교하게 규율하는 설계다.
 
둘째, 증자 전 사전 공시 및 소통 허용 범위의 명시적 확대다. MIT의 슈로프(Shroff) 교수 연구팀이 2013년 <Journal of Accounting Research>에 발표한 연구는 이 문제에 대해 시사적인 답을 제시한다.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는 2005년 유상증자 전 사전 공시 규제를 완화해 기업들이 이익 전망과 자금 사용 계획을 투자자에게 보다 자유롭게 설명할 수 있도록 했다. 사전 공시 확대는 기업과 투자자 사이의 정보비대칭을 유의미하게 줄였고, 그 결과 자본 조달 비용이 실질적으로 낮아졌다. 투자자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정보를 차단하는 것이 오히려 불확실성을 키워 기업과 투자자 모두에게 불리하다는 역설이다.
 
한국의 현행 제도하에서는 이사회가 유상증자를 결의하면 즉시 주요사항보고서를 공시해야 하지만, 그 내용은 증자 규모와 방식 등 최소한의 형식적 사항에 그친다. 이후 증권신고서가 수리되어야 비로소 예비투자설명서를 통한 청약 권유가 가능하고, 효력이 발생해야 정식 투자설명서로 청약을 받을 수 있다. 증권신고서 수리 전에 기업이 투자자에게 자금 조달의 구체적 이유와 향후 전망을 능동적으로 설명하는 행위에 대한 명시적 허용 근거가 없어, 기업들은 불필요하게 소극적 자세를 취하게 된다. ‘증권의 발행 및 공시 등에 관한 규정’에 투자 목적 유상증자에 한해 증권신고서 제출 전후를 불문하고 경영진이 자금 사용 계획 및 투자 전망을 투자자에게 설명하는 행위를 명시적으로 허용하는 조항을 마련하면, 기업은 정보를 제공할 유인이 생기고, 투자자는 불확실성이 줄어들며, 증자 공시 이후 주가 하락 폭도 완화된다.
 
유상증자 활성화를 주장하면 소수주주 이익을 희생시키는 것처럼 비춰지기 쉽다. 그러나 이 글에서 제안한 두 가지 처방은 오히려 그 반대다. 소수주주 보호와 자본조달 기능 회복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해소가 단순히 주가지수의 상승에 머물지 않고, 자본이 효율적으로 배분되어 기업의 실질적 성장과 경제 전체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유상증자를 둘러싼 제도적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주주 보호와 기업의 자금조달이 서로를 강화하는 선순환 구조를 설계하는 것, 그것이 자본시장 개혁의 다음 과제다.
 
윤태준 한국ESG연구소 거버넌스본부 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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