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배덕훈 기자]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그림자 실세’로 불렸던 2인자 정현호 삼성전자 부회장의 퇴진을 결정하면서 인사·조직 개편에 포문을 열었습니다. 재계에서는 지난 3월 경영진에 통렬한 질책을 남겼던 이 회장이 ‘사법 리스크’를 완벽히 벗어 던진 후 단행한 첫 인사에 정 부회장의 용퇴가 포함된 것을 두고 예정된 수순이었다는 해석이 많습니다. 이 회장이 반도체 실적 회복세가 이어지고 있는 것과 맞물려 경영 쇄신과 세대 교체 등 원톱 체제 ‘이재용의 뉴삼성’에 본격적인 시동을 걸었다는 분석입니다. 재계 안팎에서는 이 회장의 쇄신 의지의 바로미터가 될 ‘후속 인사’에 시선이 쏠립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31일 APEC 정상회의장인 경주화백컨벤션센터에서 진행된 이재명 대통령과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의 면담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삼성전자는 정 부회장(사업지원TF장)을 회장 보좌역에 보임하고, 사업지원TF를 경영진단실과 통합해 ‘사업지원실’로 격상하는 인사·조직 개편을 지난 7일 단행했습니다. 연말 정기 인사를 앞두고 발표된 ‘깜짝 인사’지만, 재계에서는 이 회장이 경영 쇄신을 위해 본격적인 칼을 빼 들었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10년 가까이 이어진 사법 리스크를 떨쳐낸 이 회장이 단행한 첫 인선이라는 상징성 외에도 경영·재무·인사를 틀어쥔 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해온 정 부회장의 2선 퇴진의 무게감이 남다른 까닭입니다.
재계에서는 이번 정 부회장의 용퇴가 예정된 수순이라는 평가가 많습니다. 그동안 정 부회장은 그룹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 대신 신설된 사업지원TF(태스크포스)를 이끌며 위기 관리자로서 명실상부 그룹 2인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삼성그룹의 전방위적 위기는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고, ‘그림자 실세’였던 정 부회장이 이 회장의 신뢰를 등에 업고 의사결정 자체를 주도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등 ‘정현호 체제’의 대수술이 머지 않았다는 예측이 많았습니다. 이에 사법 리스크를 온전히 떨쳐낸 이 회장이 위기의 반도체 사업 턴어라운드마저 이뤄내자 본격적인 경영 쇄신의 첫 일환으로 정 부회장의 교체를 선택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재계 관계자는 “이번 인사는 이 회장이 반도체 사업 반등으로 실적에 자신감이 붙은 상황에서 종합적인 변화의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사회적 요구에 따른 인사로 보인다”며 “특히 정 부회장의 입지가 너무 센 상황에서 이 회장이 독자적 행보가 어렵다는 우려의 시선도 있었기에, 이를 돌파하고자 한 판단이 깔려 있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정현호 전 삼성전자 부회장. (사진=연합뉴스)
정현호→박학규·최윤호 ‘세대교체’
이번 인사에서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세대교체’입니다. 1960년생인 정 부회장의 후임으로는 1964년생 박학규 삼성전자 사업지원TF 사장이 초대 사업지원실장에 내정되며 그룹 전략·재무를 책임지는 중책을 맡게 됐습니다. 또한 1963년생인 최윤호 경영진단실장(사장)도 사업지원실 내 전략팀장에 보임됐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재무통’으로 이 회장의 두터운 신뢰를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미래전략실 출신으로 디바이스경험(DX)부문 경영지원실장(CFO)을 역임했다는 공통점도 있습니다. 이에 재계에서는 그룹 내 ‘에이스’로 꼽히는 이 회장의 ‘복심’ 두 사람을 요직에 앉힌 것으로 연말 인사 전 ‘이재용의 뉴삼성’을 위한 토대를 다진 인선이라는 해석이 나옵니다.
다만, 그룹 내부에서는 박 사장이 색채가 다소 옅은 점 등을 근거로 우려 섞인 기류도 일부 감지되는 가운데, 후속 인사에 이목이 쏠립니다. 이른바 ‘정현호 라인’에 대한 물갈이 전망 등 후속 인선의 폭에 따라 이 회장의 경영 쇄신 의지를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계 관계자는 “박 사장과 최 사장 모두 색채가 강한 인물은 아니라 이 회장이 자구책 형태로 종합적으로 판단한 것 같다”며 “향후 1년 동안 정 부회장의 그림자를 얼마나 지울 것인지에 대한 이 회장의 고민이 담긴 것 같고 후속 인사를 좀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이재용, 족쇄 풀고 ‘뉴삼성’으로
이번 인사·조직 개편이 ‘뉴삼성’으로의 본격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는 평가와 함께 그간 조용한 경영 행보를 이어가던 이 회장의 보폭도 넓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취임 3주년인 올해 이 회장은 사법 리스크 해소 전후로 광폭 행보를 통한 성과를 구체화하며 글로벌 경영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박학규 삼성전자 사업지원실장. (사진=연합뉴스)
이 회장은 지난 7월 미국 출장 전후로 반도체 반등의 신호탄을 쏜 바 있습니다. 출국 전날 삼성전자는 테슬라와 23조원 규모의 역대 최대 규모 파운드리 공급 계약을 맺었고, 이 회장이 미국 체류 중에는 텍사스주 오스틴에 있는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장에서 애플의 차세대 칩을 생산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특히 이 회장은 방미 중 한미 관세 협상을 측면 지원하는 데 일조한 것으로도 알려졌습니다. 17일간의 미국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이 회장은 “내년 사업을 준비하고 왔습니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지난달 1일에는 방한한 샘 올트먼 오픈AI CEO(최고경영자)와 만나 대규모 인공지능(AI) 프로젝트인 스타게이트에 대한 반도체 공급과 데이터센터 건설에서 협력하기로 했고, 같은 달 23일에는 TSMC 독점을 깨고 테슬라의 AI 반도체 칩 ‘AI5’ 생산 참여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백미는 지난달 30일 젠슨 황 엔비디아 CEO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한 이른바 ‘깐부 회동’입니다. 이날 회동은 사실상 ‘AI 동맹’을 전세계에 알린 상징적 만남으로 이튿날 엔비디아는 삼성전자의 해묵은 과제였던 고대역폭메모리(HBM3E) 납품을 사실상 공식화하고 그래픽처리장치(GPU) 공급 등 전방위적 ‘AI 밀월’을 선언한 바 있습니다.
이 회장은 오는 14일에는 방한하는 올라 칼레니우스 메르세데스-벤츠 회장과 반도체·배터리·디스플레이 등 전장(차량용 전자·전기 장비) 사업 협력 방안을 논의하는 등 ‘뉴삼성’의 경영 행보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이 회장이 그동안 강력한 리더십을 보이지 못했다는 지적이 많지만 조직 개편 등 개인 리더십을 보일 수 있는 행보를 계속 할 가능성이 크다”며 “특히 사업지원실로의 조직 개편의 경우 대외 관계나 로비 등의 창구가 아니라 전략적 방향성과 사업 포트폴리오 재건에 집중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배덕훈 기자 paladin703@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