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세기 후반 아일랜드에선 인구 약 800만명 중 100만명이 굶어 죽고 100만명 이상이 미국 등으로 이주했다. 주식이었던 감자에 대규모 역병이 발생하자 벌어진 일이다. 이렇게 속수무책이었던 이유는 뭘까? 당시 아일랜드 농민들은 ‘럼퍼(Lumper)’라는 단일품종의 감자에 의존했다. 유전적 다양성이 없다 보니 역병은 삽시간에 아일랜드의 감자밭을 파괴해버렸다.
이런 일이 21세기 한국에서 벌어질지 모른다고 경고하면 모두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지금 한국 정치가 그렇다. 정치는 본래 다양한 목소리가 모여 하나의 조율된 합주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정치 무대는 점점 단선적인 독주곡에 가까워지고 있다. 이재명정부 시대, 거대 양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 질서 속에서 다원성은 점점 자취를 감추고 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은 내부의 입장 차이를 ‘다원성’으로 받아들이기보다 ‘배신’, ‘이적행위’로 규정하는 듯하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는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의견을 말할 권리는 끝까지 지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의 생명은 바로 이 태도, 즉 타인의 발언 권리를 존중하는 데 있다. 그러나 오늘날 정치권과 그 주변의 유튜브 채널, 열성 지지자들은 정반대의 풍경을 보여준다.
이런 경향은 정치권 내부를 넘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정치 유튜브와 SNS는 갈등을 증폭시킨다. 자극적인 언어와 음모론적 서사가 조회수를 끌어올리면서 ‘중도’나 ‘다양성’은 설 자리를 잃는다. 정치가 ‘의견의 시장’이 아니라 ‘전쟁터’로 변하는 순간 대화와 협상의 공간은 사라진다.
물론 반론도 있다. 정치적 결집이 필요할 때 내부의 다양한 목소리는 힘을 분산시킬 수 있다. 외부의 거센 도전에 맞서기 위해 ‘원 보이스’를 내는 것이 전략적으로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전략적 단일성’이 ‘상시적 획일성’으로 굳어질 때다. 정치가 본질적으로 다원적 공간임을 부정하면 결국 정당은 스스로 자멸하게 된다.
정치학자 로버트 달(Robert Alan Dahl)은 민주주의를 ‘권력의 분산’으로 정의했다. 권력이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다양한 이해관계가 서로 견제하고 타협하는 구조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지금의 한국 정치는 달이 말한 ‘폴리아키(polyarchy)’의 길에서 벗어나 권력을 집중시키고 단일화하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이는 민주주의의 토대를 위태롭게 하는 흐름이다.
지금 우리 정치에 필요한 것은 다른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 전략적 차이를 견뎌내는 인내심, 그리고 자기 진영 내부의 비판조차도 포용할 수 있는 성숙함이다. 민주주의는 정답을 강요하는 교실이 아니라 서로 다른 답안을 놓고 토론하는 열린 시험장에 가깝다. 시험장에서 다양한 답안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이름만 남은 껍데기가 될 것이다.
우리는 식민지, 독재와 힘겹게 싸워 민주주의를 이뤄냈다. 아직도 식민지와 독재의 그늘은 변형된 형태로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다원성은 사치의 영역으로 치부돼왔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위협을 막아내기 위해서도 다원성은 존중되고 권장돼야 한다.
정치는 숲과 같다. 숲은 나무들이 저마다의 뿌리와 잎을 가지고 공존할 때 비로소 생태계가 유지된다. 그러나 지금의 정치는 단일한 나무가 숲 전체를 지배하려는 모양새다. 다른 나무의 뿌리를 침식하고 햇빛을 독점하려는 순간 숲은 다양성을 잃고 결국 스스로 붕괴한다. 정치적 다원성을 외면하는 오늘의 흐름은 민주주의라는 숲을 스스로 황폐화시키고 있다.
백승권 비즈라이팅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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