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내란 종식’이 아니라 ‘내전 종식’이다
2025-09-23 06:00:00 2025-09-23 06:00:00
한나라 건국의 주역 유방(劉邦)이 초한전쟁을 거쳐 천하를 손에 넣었을 때, 그의 정치 방식은 여전히 ‘말 위’에 있었다. 즉 무력과 전장의 방식으로 나라를 다스리려 한 것이다. 이때 직언을 한 인물이 바로 육생(陸生, 혹은 육가)이다. 그는 “폐하께서는 말 위에서 천하를 얻으셨으나, 이제는 말에서 내려와 정치를 하셔야 합니다”라고 권했다. 전쟁의 논리에서 민본(民本)의 덕치(德治)로 전환하라는 충언이었다. 
 
유방은 초한전쟁 내내 병마를 이끌고 싸우며 평민 출신으로 최초의 황제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황제가 된 이후에도 군사적 진압과 직접 친정에 의존하는 강경책을 지속했다. 육생의 발언은 단순한 수사적 표현이 아니었다. 나라를 얻는 데 필요한 용기와 결단, 전쟁의 냉혹한 기술이 곧 통치의 원리로 지속될 수는 없다는 역사적 자각이었다. 유방은 이를 받아들이고 자신의 통치 방식에 변화를 꾀했다. 이 고사는 이후 중국사에서 “전쟁으로 나라를 얻을 수는 있어도 전쟁만으로 나라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교훈으로 회자됐다. 혁명과 격동의 시대가 끝난 뒤 지도자가 반드시 품어야 할 자기 성찰, 즉 무력에서 정치로, 싸움에서 통합으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고전적 언어가 된 것이다. 
 
2025년 하반기, 이 고사가 한국 정치에서 다시 소환되었다. 헌법학자이자 변호사인 이석연 국민통합위원장이 “말에서 내려와 전체 국민을 아우르라”고 정부에 조언한 발언이 화제가 되었다. 그는 더불어민주당의 논리만으로 국정을 운영해서는 안 되며, 집권 과정에서의 투쟁 논리를 내려놓고 국민 전체를 포용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취임식에서도 초당적·포용적 리더십을 주문하며, 특정 정당의 이해를 넘어선 국정 운영의 원칙을 제시했다. 
 
이 조언이 나온 배경을 살펴보면 그 긴박함이 드러난다. 여당은 ‘내란 종식’을 부르짖고 있다. 계엄과 탄핵을 거친 지난한 시기를 끝내고 국가를 정상화하자는 구호는 당연히 필요한 시대의 외침이다. 그러나 사법적 절차는 끝날 기약이 없고, 내란을 은근히 엄호해온 국민의힘은 여전히 극우적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이 흐름이 계속되면 작년의 내란이 내년의 내전으로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증폭된다. 
 
이석연 위원장의 말은 단순한 덕담이 아니다. 내란의 종식을 넘어 내전의 불씨를 꺼야 한다는 절박한 경고다. 계엄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남은 것은, 극심한 사회 균열과 서로를 적대시하는 정치 진영의 피로감이다. ‘내란 종식’이 구호에 머무르고, 반대 진영을 향한 증오가 정치적 동력으로 재활용된다면 우리는 또다시 파국으로 치닫게 될 것이다. 이 말이 의심스러운 지금의 미국을 보라. 한때는 민주주의 종주국이었다는 나라가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를. 사실상 저 나라는 정치·심리적으로 이미 내전 상태 아닌가. 
 
진정한 말 아래서의 민본정치는 사회개혁이다. 내란의 뿌리는 깊은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해 강요된 좌절과 분노였다. 이제는 내란 그 자체의 종식만이 아니라 내란의 원인을 제거하는 우리 사회의 불평등을 해소하고 완화하는 것이 진정한 내란 종식이다. 이 개혁을 소홀히 하면 내란은 내전이 될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말 위의 승리자가 아니다. 말에서 내려와 국민 모두를 향해 열린 정치를 실천할 지도자다. 내란을 끝냈다고 자부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내전의 가능성을 차단하고, 상처 입은 국민을 하나로 묶을 새로운 정치가 필요하다. 유방에게 육생이 던졌던 그 한마디, “말에서 내려와 정치를 하라”라는 말은 2000년을 넘어 오늘의 한국 정치에도 울림을 준다. 내란 종식의 시대에 우리가 진정 요구해야 할 것은 바로 ‘내전 종식’이며,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를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이다. 지난 문재인정부가 하지 못했던 개혁, 유례없는 자산 불평등이 교육 불평등, 일자리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극심한 양극화, 이걸 제거하는 것이 바로 극우의 토양을 제거하는 것이다. 이보다 더 분명한 내란 종식이 어디에 있겠는가. 
 
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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