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어릴 적 여름에는 소나기가 내렸고, 겨울에는 삼한사온이 이어졌다. 지금의 아이들이 어른이 되면 여름과 겨울을 어떻게 기억할까?
국어사전은 계절을 “일 년을 기후 현상의 차이에 따라 나눈 한 철”이라고 정의하지만, 계절은 이보다 더 복잡한 시간 개념이다. 계절이 시간의 구분된 단위인 건 맞지만, 환경의 변화를 감각하고 반응하는 경제·사회 활동을 규정하는 시간적 틀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온대 지방의 사람들은 일 년을 네 계절로 인식하고, 열대 지방 사람들은 우기와 건기로 나눈다. 호주의 원주민 눙가족(noongar)은 포근한 ‘비락’, 무더운 ‘부누루’, 서늘해지는 ‘드제란’, 춥고 습한 ‘마쿠루’, 점점 따뜻해지고 청명해지는 ‘드질바’ 그리고 생명이 약동하는 ‘캄바랑’ 등 여섯 계절을 산다. 꽃이 새로운 계절을 알리고, 동물과 식물의 움직임도 달라지며, 부족은 채집과 사냥, 야영할 장소를 바꾼다. 우리나라는 농사일을 중심으로 한 계절 감각이 발달했다. 봄에는 모내기를 하고 여름에는 잡초를 뽑고 가을에는 추수를 하는 것처럼.
아름다운 시간의 교향곡에 불협화음이 나기 시작했다. 영국 런던정경대 지리환경학과 토머스 스미스 교수 등은 최근 <환경지리학진보>에 주목할 만한 논문을 실었다. 이들은 인류세 들어 새로운 계절이 생기고, 기존의 계절이 사라지는가 하면, 계절의 리듬이 깨지고, 강도와 세기가 오락가락한다고 밝혔다. 인류세는 인류 활동으로 인해 지구의 물리·화학적 시스템이 바뀌어 지구가 진입한 새로운 지질시대를 말한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연무 시즌’이라는 새로운 계절이 생겼다. 매년 6~10월 보르네오섬에서 팜유 농장 개간을 위해 숲을 태우면, 그 연기가 바람을 타고 국경을 넘어 퍼진다. 몇 년 전, 보르네오섬 북부 말레이시아의 쿠칭에 도착해 택시를 탔는데, 마스크를 쓴 운전사는 “지금은 연무 시즌”이라고 자연스럽게 말했다. 인도네시아 발리에는 ‘쓰레기 시즌’이 있다. 12~3월 우기가 되면 해류를 타고 플라스틱 쓰레기가 해변으로 밀려온다.
어떤 계절은 사라졌다. 2008년부터 기상청은 ‘장마’를 공식 용어로 쓰지 않는다. 당시 기상청 관계자는 “장마가 끝난 뒤에도 강수가 여전히 지속된다. 장마가 끝났다고 발표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다”라고 말했다.
계절의 리듬도 엇박자를 낸다.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봄이 일찍 오고, 여름이 길어진다고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마찬가지로 미국인들에게 허리케인 시즌과 산불 시즌은 점점 길어졌다. 계절의 강약도 극단으로 치닫는다. 여름 폭염이 심해졌고, 겨울 추위는 약해졌다. 4분의 4박자 노래에서 ‘강 약 중강 약’의 위치가 바뀌고 엉클어진 것처럼 말이다.
자연의 시계가 고장 났다. 시간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것이라고 했는데, 지금의 계절은 춤이라고도 할 수 없는 난폭한 몸부림이 되어버렸다. 고장의 주범인 인간은 새로운 계절을 들이민다. 지구는 더는 자연의 시계가 아닌 인간이 만든 시계로 돌아간다.
인간이 계절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계절 또한 자원과 권력의 배분 그리고 지식을 생산·통제하는 정치경제 구조에 포함됐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동남아시아에서 ‘연무 시즌’을 하나의 ‘계절’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순간 연무를 일으킨 오염자들의 책임이 가려진다. 계절이라고 ‘호명’하는 순간 문제가 정상화하는 것이다. 우리가 산불에 둔감해지고 미세먼지를 일상사로 받아들이는 순간도 마찬차지다.
앞으로 자연적인 계절은 소멸하고 더 많은 인류세 계절이 도래할 것이다. 올해 여름도 7월 초부터 뜨겁다가 며칠 동안 말도 안 되는 집중호우가 내렸다. 과거의 여름으로 현재의 여름을 정의할 수 없는 시대다. 인간의 영향으로 생긴 수많은 계절이 생기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과거의 계절을 향수로 남겨둘 것인가?
남종영 KAIST 인류세연구센터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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