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연기금, 모험을 시작하다
2025-08-07 06:00:00 2025-08-07 06:00:00
2001년 제도 출범 이후 20여년간 연기금투자풀은 안정적 자산 운용의 상징이었다. 국채나 우량 채권 중심으로 안전판 역할을 해왔고, '벤처투자'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지난달 22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LP 첫걸음 모펀드'는 이 고정관념을 단번에 깨뜨렸다. 
 
그동안 연기금투자풀이 벤처에 손을 대지 않았던 이유는 분명했다. 안정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연기금의 특성상 고위험·고수익인 벤처투자는 부담스러운 선택이었다. 실제로 일부 대형 연기금이 개별적으로 시도한 벤처투자 실적이 저조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저성장·저금리 시대가 장기화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전통적 투자처만으로는 목표 수익률 달성이 어려워졌고, 동시에 인공지능(AI)과 바이오 등 혁신 산업의 성장 잠재력이 입증되면서 벤처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이다. 
 
이번 투자 구조를 보면 신중함이 엿보인다. 단독 투자가 아닌 모태펀드와의 공동 출자와 우선손실충당과 풋옵션 등 안전장치 마련까지. 리스크를 줄이면서도 벤처 시장에 안착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특히 첫걸음 모펀드라는 이름부터가 상징적이다. 벤처투자 경험이 없는 기관의 시장 진입을 돕겠다는 취지가 명확히 드러난다. 이는 단순한 수익 추구를 넘어 벤처 생태계 전반의 저변 확대를 노린 정책적 의도가 담겨 있다. 
 
405억원이라는 규모 자체는 벤처 시장에서 그리 큰 금액은 아니다. 하지만 상징적 의미는 크다. 연기금투자풀의 벤처투자 진출은 안정성을 중시하는 기관투자자도 이제 벤처를 외면할 수 없다는 시대적 변화를 보여준다. 
 
실제로 뉴스토마토 K-정책금융연구소와 벤처기업협회 등은 더 나아가 법정기금의 벤처·스타트업 투자 의무화를 주장하고 있다. 국민연금·고용보험기금 등을 포괄하는 법정기금의 자산 규모는 약 3000조원, 연간 운용 규모만 약 955조원에 달한다. 만약 이들 기금이 본격적으로 벤처투자에 나선다면 그 파급력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물론 리스크는 존재한다. 벤처투자는 본질적으로 고위험 투자이며, 안정성을 추구하는 연기금과의 근본적 성격 차이는 여전하다. 특히 투자 성과가 나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벤처투자의 특성상 단기적 성과 압박을 받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벤처·스타트업 대상 장기 분산투자는 상당한 안정성을 갖췄다는 반론도 설득력을 얻는다. 개별 기업의 위험은 크지만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접근하고 충분한 시간을 두고 투자한다면 위험을 상당 부분 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연기금의 안정적 자금이 벤처 생태계에 유입되면 스타트업은 더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고, 이는 다시 더 나은 투자 수익으로 연기금에 되돌아온다. 동시에 혁신 기업의 성장은 경제 전체의 역동성을 높이는 효과도 가져온다. 말 그대로 '선순환 구조'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연기금투자풀의 첫 벤처투자가 시장에 던지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안정만 좇는 시대는 끝났다. 혁신과 수익,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발걸음이 시작됐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첫걸음'이 지속 가능한 투자 문화로 자리 잡는 것이다. 20년 넘게 닫혀 있던 문이 열린 만큼 그 문을 통해 들어올 새로운 가능성이 기대된다. 
 
오승주 정책금융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고재인 자본시장정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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