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칼럼) '극우'가 된 조카에게
2025-02-10 16:16:00 2025-02-10 16:23:20
[뉴스토마토 오승훈 산업1부장] 잘 지내지? 지난 설에 누나로부터 얘길 듣고 걱정스런 마음에 편질 쓴다. 네가 누나에게 했다고 들은 말들은 대략 이랬어. ‘빨갱이들이 나라를 장악하려고 해서 대통령이 어쩔 수 없이 계엄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재명이 나라를 통째로 북한에 넘기려고 한다. 국회는 빨갱이 소굴이라 계엄으로 다 잡아들이라고 한 거다.’
 
먼저 빨갱이라는 표현부터 짚어야 할 듯해. 한국현대사에서 빨갱이라는 단어는 마치 중세시대 ‘마녀’와 같은 의미야. 마녀로 지목된 이를 우물에 빠뜨렸는데 살아나오면 진짜 마녀라고 화형시켜 죽였다는 얘기 기억하지? 한국전쟁 전후에도 100만명에 가까운 이들이 빨갱이로 몰려 군경에게 억울하게 학살당했단다. 만약 우리 가족이 실제와 무관하게 빨갱이라는 말 한마디에 제대로 된 재판도 없이 총살됐다면, 넌 빨갱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빨갱이라는 멸칭을 쓸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단다. 나는 빨갱이라는 말이 무섭다.
 
또한 빨갱이들이 나라를 장악하려고 한다는 전제도 사실이 아니란다. 유추하면 아마 지금 더불어민주당을 ‘빨갱이들’로 지칭한 걸로 보이는데, 민주당은 지금의 국민의힘과 정책적 차이가 크지 않은 중도보수 정당이야. 원내 1당이지만 거부권에 막혀 법도 통과시키기 어렵지. 나라를 장악한 건 지금은 구속된 대통령이란다. 대통령은 결코 약자가 아니야.
 
아울러 이번 계엄 선포가 헌법이 요구하고 있는 계엄요건에 하나도 맞지 않는다는 건, 법조계와 학계의 일치된 의견이란다. 민주당이 벌이는 일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본다면, 대통령이 벌이는 일에도 의도가 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나라를 구하기보다 자신을 구하려고 한 계엄이라는 비판도 함께 봐야 한다는 말이야.
 
나라를 북한에 넘기려 한다는 것도 남북관계 개선에 우호적인 민주당 성향을 음모론적으로 비난하는 말에 불과해. 설령 민주당이 그렇게 한다 해도 한국사회 주류인 재벌-언론-관료의 '신성동맹'이 이를 용인할까. 말도 안 되지.
 
사실 최악의 평화라도 최선의 전쟁보다 항상 더 낫다는 점에서, 과거 서독이 동독에 한 것처럼 북한에 돈을 줘서라도 평화를 살 수 있다면 난 그게 옳다고 봐. 윤석열을 포함해 전쟁도 불사하겠다고 말한 정치인 가운데, 자신이 전장에서 뛰겠다고 한 자는 없다는 걸 명심하렴. 전쟁을 결정한 자와 전쟁을 치르는 자가 다르다는 것이 전쟁의 첫 번째 비극이니까.
 
주로 유튜브를 통해 가짜뉴스를 접했을 텐데, 이제라도 한국현대사를 비롯한 인문학 책들을 읽어보길 권한다. 무엇보다 누군가의 주장이 타당한지, 논거들이 있는 것인지 회의하는 태도가 중요해. 내 말도 포함해서. 그렇지 않으면 나도 모르게 지배자들의 조작과 선동에 세뇌될 수 있거든. 곧 다시 만나서 얘기하자꾸나.
 
오승훈 산업1부장 grantorino@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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