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오랫동안 천착했던 물음은 바로 이것이었다. 정답은 없겠지만 정답이라 믿고 싶은 답들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동서고금의 많은 사상가가 이미 숱하게 고민했던 주제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들이 나의 답이 될 때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막상 답을 찾고 보니 앎보다 더 중요한 건 실천이었다. 앎을 몸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습관, 나아가 습관이 곧 나의 정체성이 되게 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지난한 시간이 흘렀다. 아직 내 정체성이 내가 알고 있는 답과 완벽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더 이상의 의심은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 생각이 자만이자 만용이었다는 걸 지난 연말과 새해에 난 통렬히 깨닫는 중이다. 난 또다시 의심의 강 속에 빠지고 말았던 것이다.
새로운 나의 질문은 단어 하나의 차이이다. ‘어떻게’에서 ‘왜’로. 왜 살아야 하는가. 어찌 보면 같은 질문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둘은 전혀 다른 질문이다. ‘어떻게’가 ‘왜’가 되는 것은 이미 의미를 잃었음을 의미한다. 삶의 의지 대신 온갖 회의와 허무, 불신이 들어찬 것이다.
탄핵안이 통과되자마자 천지가 개벽할 것이란 환상을 가진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런데도 개인과 조직의 이해득실로 이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려는 사람들의 작태를 보고 있자면 자꾸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들이 국민의 절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국민은 도대체 ‘왜’ 또다시 이 추위에 거리에 서야 하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179명의 아까운 생명을 앗아간 참사를 보면서 ‘왜’의 횟수는 더 잦아진다. 정확한 사고원인이 밝혀질 때까지 섣부른 진단과 비판은 삼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비전문가의 눈으로도 이 사고가 오로지 자연재해로만 보이지 않음은 어찌할 것인가. 사고 이후 드러나는 많은 문제점들은 인간의 욕망이 대체로 비극과 한 몸을 이룰 수밖에 없음을 재확인시켜 주고 있다.
“조선이란 나라는 수백 년간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 온 나라지만 저 나라 백성들이 제일 골칫거리다. 받은 것도 없으면서 국난이 있을 때마다 이상한 힘을 발휘한다.”
영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조선인을 두고 이렇게 말했을 때 무릎을 쳤다. 이 말을 실제로 그가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국민의 위대함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다. 한편 의료계와 정치권의 풀리지 않는 갈등, 대외신뢰도 하락으로 인한 경제위기 심화, 갈수록 격화하는 국민의 반목과 혐오 등 어느 것 하나도 녹록치 않은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이 웃음을 잃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 외려 슬퍼하고 걱정하고 분노하다가 절망에 빠지는 수순이다. 그리고는 이내 ‘왜’라는 질문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라고 윗세대가 수많은 국난 속에서 피를 흘린 게 아닌데 그 피의 대가가 자꾸 허사가 되는 일이 반복된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의 수고도 똑같이 헛수고가 되고 말리라는 비관과 염세는 어쩌면 당연하기까지 하다.
과연 연쇄 추돌이 일어나는 컴컴한 터널 속에 갇힌 우리가 한 줄기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까. ‘사는 이유’ 아니,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내 목숨은 죽은 동지들의 것, 나는 죽은 동지들의 목숨을 대신하며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소.”
다행히 안중근 의사는 당신만의 답을 갖고 있었다. 이 답이 지금의 우리에게 유효할지도 모르겠다. 독립을 위해 함께 싸운 사람이 아니어도, 목숨을 빚진 사이가 아니어도 우리의 오늘은 먼저 간 이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었다는 분명한 이 사실은 오늘 하루의 충분한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니 부디 살아가야 한다. 지치지 말고 애써 웃으면서.
이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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