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돌아오는 송년회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이 늘 똑같습니다. 동창, 동료, 동업자, 동호회원, 동네 친구들과 만나 얼굴 보며 회포를 푸는 자리라 특별한 주제가 없습니다. 예전의 추억거리나 일상사를 늘어놓으며 잡담하니 밋밋하기만 합니다. 정치적 화제는 가급적 삼갑니다. 양극단으로 의견이 갈리는 친구들 사이에 싸움 나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술잔을 돌리며 열심히 술만 마시다 돌아가며 건배사하고 끝내는 게 의례적입니다.
그러나 2024년 송년회는 특별났습니다. 어디서 누구를 만나건 다 똑같은 주제에 관해 거론합니다. 하도 열나게 떠들고 다들 한마디씩 말하기 바빠 술도 별로 마시지 않으며 안주가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어떤 송년회에서든 모두의 관심을 끄는 화제는 당연히 ‘비상계엄’이지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을뿐더러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건이 벌어진 겁니다. 우리 일생에 다시는 보지 않으리라 생각한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군부대 출동 사태까지 터졌으니 말을 아낄 수가 없지요.
여러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던지는 질문은 무슨 계엄을 그리 허술하게 했느냐는 겁니다. 비상계엄이라는 중차대한 조치를 하려면 제대로 하던가 아니면 아예 하지 말아야지 누가 봐도 엉성하다는 겁니다. 정치적 성향이나 지지하는 정당을 떠나 모두가 공통으로 갖는 궁금증입니다. 내가 해도 그것보다는 잘하겠다고 떠벌리며 농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비상계엄을 주도한 권력자들이 비웃음을 사며 바보가 되는 대목입니다.
그다음의 화제는 왜 12월 3일 밤에 했느냐는 겁니다.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의결을 하지 못하게 하려면 주말에 해야 했는데 무엇 때문에 화요일에 했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거사일을 12월 3일로 정한 이유가 구구절절 나오다 무속이 언급되며 심각한 담론이 가벼운 가십거리로 흘러갑니다. ‘그날이 길일이었다’, ‘12·3을 한문으로 풀면 왕(王)자가 된다’는 둥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옵니다.
그럼 이어서 풍수로 옮겨 갑니다. 요즘 ‘황금폰’으로 논란의 주인공이 된 자칭 ‘미륵보살’에서 법사 도사 스승 역술인 등에 관한 소문이 등장합니다. 다들 이해를 못 합니다. 그리 용한 점쟁이들이 왜 죽을 길만 골라서 가르쳐주었느냐고요. 이렇게 대형사고를 치고 패가망신하면 청와대보다 용산이 더 풍수가 나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달립니다.
그다음에 진짜 중요한 질문이 나옵니다. 왜 무엇 때문에 계엄이라는 비상수단을 취했느냐 하는 겁니다. 여기서 ‘부정선거론’이 튀어나옵니다. 선거관리위원회의 부정선거 음모론에 관해서는 추측과 추리가 무성합니다. 놀랍습니다. 많은 사람이 얻는 정보의 원천이 유튜브 동영상이더군요. 비상계엄처럼 엄청난 사건의 배후에 관한 궁금증을 해소할 곳이 유튜브 채널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다 비상계엄이 내란죄가 되느냐로 화제가 옮겨가며 살짝 논쟁이 벌어지지만, 송년회의 취지를 살려 금방 봉합됩니다.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안를 심의한 국무회의에 참석한 국무위원들도 내란죄로 처벌받느냐를 놓고는 이름도 어려운 죄목이 등장합니다. 내란죄에는 내란 음모를 인지한 순간 적극적으로 막지 않아도 벌을 받는 ‘부화수행’이라는 죄목이 있다는 겁니다.
비상계엄 선포를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속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무모하게 남들 앞에서 비상계엄을 지지한다고 공개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건 보수라 자칭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상계엄도 촛불시위도 싫다고 말하는 양비론조차 욕을 먹습니다. 어떻게 민중의 촛불과 군인의 총칼을 비교하느냐는 비난에 할 말을 잃습니다.
그 밖에 권한대행의 탄핵이나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이 화제에 오르기도 합니다. 의견이 다른 부분에서 약간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송년회 분위기를 깨지 않으려고 서로 자제해 부딪치는 일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나같이 공감하고 우려하는 것은 경제에 미치는 악영향입니다. 환율과 주가가 요동치며 내수가 얼어붙고 수출이 하락세를 보이는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 태산입니다. 특히, 내년 초에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 한국에 가할 압박과 요구를 견뎌내고 대응할 수 있을지 불안해합니다. 러시아의 지원 덕분에 군사력을 보강한 북한이 국정 공백을 틈타 무슨 도발을 저지를지에 대한 염려도 큽니다. 이러다 정치적 혼란이 극심해져 중진국으로 추락하는 것이나 아닌지 심히 걱정합니다.
그래도 잘못하면 비극이 될 뻔했던 비상계엄이 무산되어 다행이라고 안도합니다. 어서 빨리 혼란과 대립이 종결되어 정상적인 나라로 돌아갈 날이 올 것을 희망하며 이를 위해 건배하고 송년회를 끝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Dynamic Korea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절절히 실감 나는 2024년 송년회였습니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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