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아무리 가도 사랑은 변치않아/ 세상 끝날까지 남으리/ 사랑에 대한 나의 시가 거짓이라면/ 사랑에 대한 나의 시는 모두 거두리
영화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에서 인용된 셰익스피어의 시 속에는 확신이 있다. 사랑은 영원하다는 확신 말이다. 시는 비록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의 입에서 나왔으나 수천 년 동안 불멸하며 인류를 지켜 본 뱀파이어 아담과 이브 역시 그렇다고 인정하니 일단은 그 확신을 의심하지 말자.
온전한 동의가 아닌 조건적 동의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매일 발생하는 흉악범죄들, 끊이지 않는 테러와 전쟁을 목도하며 인간이 인간을 불신하고 세상에 냉소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껏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적자생존’법칙에 따르는 ‘이기적 유전자’ 덕분이 아니던가. 인간의 이타성마저도 유전자의 생존과 복제를 위한 필요조건이었음을 감안하면 인간의 선한 본성을 순전히 긍정하고 신뢰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는 우익이 극성한 가운데 한바탕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류를 위협한 뒤로 사람들은 더욱 비관주의로 흘러가는 양상이다. 인류는 특정 계층이 아닌 인류 전체의 절멸 가능성을 경험했다. 기후위기의 심각성도 해가 다르게 체감 중이다. 머리를 맞대고 해결책을 논의해야 할 자들은 되레 사람들의 불안감을 이용해 정치마케팅에만 열중한다. 악순환이다. 그러니 허무주의는 어쩌면 내가 살아있다는 걸 증명하는 절박한 감정인지도 모르겠다.
절박하다고 해서 그것이 최선인 것은 물론 아니다. 우리의 최선은 역시 ‘생동’의 감각으로 사는 것이다. 그리 살되 바로 옆에 있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아마도 이 점을 일깨워주기 위해 거장의 감독들이 모종의 약속 같은 걸 하지 않았나 싶다. 최소한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과 션 베이커 감독 두 사람만큼은 정말 그런 것 같다. 놀라울 만큼 닮았다.
“내 옆방에 있어줄 수 있어?”
잉그리드에게 자신의 마지막 여행에 동행해줄 것을 제안하는 마사. 알모도바르 감독의 <룸 넥스트 도어>에서 우리는 인간이 인간에게 베풀 수 있는 자비가 어떤 모습인지를 보게 된다.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마사의 몸에 언제까지라도 따뜻한 피가 돌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은 마사 옆에 있는 잉그리드의 뜨거운 온기가 우리에게까지 전해져서일 것이다.
“난 아노라라는 이름이 더 좋아. 아노라는 빛, 고귀함, 아름다움이라는 뜻이래.”
베이커 감독의 <아노라>는 한 발 더 나아간다.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남자 이고르의 호의와 배려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되찾아준다. 있지만 불리지 않았던 이름. 그것은 이름이면서 그녀의 정체성이었다. 돈으로 사람의 마음까지도 살 수 있다는 세상이지만 아노라를 향한 그의 마음이 정말 돈의 작용이라고 믿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각각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과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두 감독들의 눈은 볼록렌즈다. 큰 것을 보고 크게 말하지 않는다. 작은 것을 확대해 조용히 속삭일 뿐이다. 세상의 진리는 보잘 것 없는 한 개인의 삶 속에서도 다 발견된다는 걸 알기에 굳이 시야를 넓히고 목청을 높일 이유가 없는 것일 테다. 더 중요한 건 이들의 믿음이다. 인간의 본성은 악함보다는 선함이 우선한다는 그 믿음.
자, 이제 대문호 셰익스피어와 두 뱀파이어에 이어 거장 감독들까지 입을 보탰으니 ‘사랑은 영원하다’는 말에 온전한 동의가 가능해질까.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해도 괜찮다. 의심을 한다는 건 아직 절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원을 묻지 않고도 우리는 사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남을 수 있다. 그거면 됐다.
이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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