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말하지요. 우리들은 집에서 안전하게 살지만 자기들은 창을 들고 싸운다고. 바보 같으니라고! 나는 아이를 한 번 낳느니 차라리 세 번 싸움터로 뛰어들겠어요.” 고대 아테네의 비극 작가 에우리피데스 작품 속, 남편에게 복수하려 자기 자식을 죽인 메데이아의 말이다(『메데이아』 248-251행, 천병희 역). 아마 그 때도 출산이 더 힘든지 군대가 더 힘든지를 가지고 남녀가 서로 논쟁했었던 모양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에우리피데스가 이 작품을 상연했던 기원전 431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 해였고, 즉 당시 남성들에게 군대란 실제로 생사가 걸린 문제였던 것이다. “휴전 중인”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하지만 얼마 전 한국 군사문제연구원에서 여성을 징병하면 “전우애로 연애와 결혼, 출산율이 상승할 것”이란 취지의 발언이 나오면서, 안보 문제에 제일 힘을 기울여야 할 전문가들조차 실은 그냥 “무지성으로” 씨불이는 수준이라는 것이 드러나 버렸다.
지난 총선을 앞두고 이준석 의원은 여성희망복무제와 공무원 채용 시 여성 군필 의무화를 제안한 바 있다. 위 발언처럼, 이 역시 저출산으로 인한 병력 확보 문제에 대응하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물론 그는 자신은 “여성 징병” 자체에는 반대한다는 의견을 밝혔지만, 사실상 여성 징병 논의의 신호탄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현재 여성들이 군대를 안 가는데도 출산을 기피하는 상황에서, 군입대는 그런 기피를 정당화하는 이유를 하나 더 만들어주는 꼴인 것 아닐까?
무엇보다, 국가의 안보란 단지 군대의 유지와 전쟁의 승리뿐만이 아니라 인구와 생산력 유지, 전후 재건과 사회의 존속까지를 포함한다. 독일이 헌법에 “어떤 경우에도 여성은 징병되지 않는다”라고 못박은 건 여성을 우대하거나 남성을 차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바로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생식력을 여성이 지닌다는 사실에 따른 가부장적 조치였을 것이다. 군대는 남성과 여성을 “공정”하게 대우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한편 그즈음 하여 “시니어 군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얼마 전 성일종 의원의 “경계 업무에 50-60대를 채용”하자는 입법 제안을 포함해 현재까지 점점 이를 진지한 대안으로 고민하려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또 군대 보내는 거냐”며 핀잔섞인 반응이지만, 우리는 보다 진지해질 필요가 있다. 시니어 군대 얘기를 처음 언론에서 접했던 즈음, 나는 우크라이나의 전장에서 싸우고 있는 군인들의 평균 연령이 43세라는 기사를 보았다(연합뉴스 1월 21일).
현재는 25세로 낮아졌지만 그 당시 징병 가능 연령이 27세여서 젊은 병사 수급에 차질이 있다는 것이다. 그 기사의 말미에는 55세인 한 우크라이나 병사가 “나는 스무살짜리 애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그들은 우리나라의 꽃이며 아이를 낳고 길러야 하는 존재”라고 말했다는 짤막한 인터뷰가 실려 있었다. 이 사례가 보여주듯 “시니어 군대”는 단지 웃어넘길 제안이 아니다. 모든 사회는 바로 이런 중년병의 사회에 대한 사랑과 헌신,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자기이익을 넘어선 판단력을 통해 스스로를 유지해왔다.
불행히도 바로 그것이 한국 사회에서 가장 체계적으로 파괴해왔던 것이고 그 결과가 사회의 “집단적 자살”, 즉 저출산인 것이다. 보통 인간은 때가 되면 그 때에 맞는 책임을 깨닫게 된다고 한다. 나는 우리 역시 그럴 것이라는 희망이 있다. 다만 왜 지금 조금만 더 현명할 수는 없는가? 그것이 안타깝다.
노경호 독일 본대학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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