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재영 선임기자] 사상 초유의 자사주 대항공개매수가 발생해 재계의 이목을 끕니다. 고려아연이 회삿돈으로 대항공개매수에 나선 것은 국내 전례가 없습니다. 재계로서는 이번 사례가 적법한 것으로 허용되면 자사주를 경영권 방어 수단으로 적극 활용할 수 있게 돼, 관심이 쏠립니다. 아직 법원 판례도 없는 상태라 전문가들 의견도 갈립니다.
4일 업계에 따르면 통상 주주 공통재산인 배당가능이익으로 대주주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고가에 주식을 매입하면 배임 소지가 생깁니다. 하지만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가 벌어진 특수한 상황에선 예외적일 수 있다는 법률가의 견해도 있습니다. 회삿돈으로 자사주를 취득해 경영권을 방어하는 방법은 미국에서 일부 허용되는 '경영판단 보호 원칙'이나 '포이즌필'과 원리가 유사합니다. 하지만 국내에선 재계가 법률 도입을 시도했으나 아직 이뤄지지 못한 조항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법원이 고려아연 최윤범 회장 측의 경영권 방어 명분을 용인할지 주목됩니다.
앞서 법원은 영풍과 MBK 측이 제기했던 '자본시장법상 고려아연 자사주 취득이 법률 위반 사항이라 취득 금지 가처분해 달라'는 신청을 기각했습니다. 해당 자본시장법은 140조 '특별관계자를 포함한 공개매수자는 공개매수공고일부터 매수기간 종료까지 주식 등을 공개매수 외 매수하지 못한다'고 한 규정입니다. 법원은 고려아연과 영풍이 경영권분쟁 중이었던 상황을 고려해 합의된 특별관계자로 볼 수 없다고 판단하고 기각했습니다.
이와 별개로 회삿돈으로 자사주를 고가에 매입하면 법인으로선 불필요하게 자본 감소가 이뤄져 손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 영풍과 MBK 측이 제기하는 배임 문제입니다. 고려아연은 베인캐피탈까지 동원해 총 3조1000억원을 쓰기로 했습니다. 영풍과 MBK 측은 이 문제를 들어 다시 2차 자사주 취득 금지 가처분 신청을 했습니다. 또 자사주 취득결정한 이사회를 배임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1차 가처분 기각은 법원이 취득을 허용해준 근거로 작용한 셈인데, 2차 심리나 배임 사건 재판부에서 배임과 별개로 볼지가 관건입니다.
재계는 그간 경영권 방어를 위해 배임죄 규정에 경영판단 보호 원칙을 도입하자고 제안해왔습니다. 미국에서는 다양한 판례를 통해 일부 허용되고 있는 법리입니다. 회사에 손해가 발생했어도 회사경영에 비전문가일 수밖에 없는 법원이 경영상 판단이 필요한 이사나 경영진에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권재열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배임죄의 구성요건 중 하나는 자신의 재산상 이익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번 경우 이사행동이 아니라 회사행동인데 후자가 재산상 이익이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면서 “또 일반적 상황이면 배임 문제될 수 있지만 이렇게 경영권 침탈이 이뤄지면 일반적 법리를 그대로 적용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과연 대항공개매수를 하지 않고 경영권을 내주는 것이 주주를 위한 것인지 살펴봐야 할 것”이라며 “미국 등 외국 법리를 보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인데 평상시와 경영권 문제가 생겼을 때 각각 법리를 달리 적용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이 경우 아직 국내 판례가 없지만 기존 경향대로 가지 않을까 싶다. 배임죄 기본 구성요소가 재산상 이익을 위한 행위인데 회사가 먼저 있고 난 다음 (행위도)존재하는 것이라 경영권 침탈 상황에서 가만히 있는 것이 배임죄를 벗어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미국에선 경영권이 침탈되는 경우 이사회가 방어할 수 있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 국내에선 또한 상법상 이사충실의무 대상에 주주이익을 포함시키자는 법률 개정 논의가 한창입니다. 경영판단보호 원칙과 마찬가지로 이사충실의무 개정되면 이번 사례 역시 법률적 판단이 수월하겠지만 아직 도입 전입니다.
김진방 인하대 경제학과 교수는 “상법상 회사나 주주이익에 반하는 것이냐가 배임여부가 되겠지만 일단 회삿돈으로 경영권을 방어한다는 것 자체가 시장경제원리에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며 “법인(고려아연) 논리에 따르면 그 돈이 결국 주주에게 가는 것이니까 손해 끼치는 건 아니라고 판단한 듯한데 그게 일부 주주에게만 돌아갈 가능성이 크고 대다수 주주에겐 손실로 귀결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영풍과 MBK 측은 이번 자사주 취득을 통해 자본이 감소하고 차입금이 늘어난다고 공격합니다. 그는 “기존 주주에게 무상으로 주식을 나눠줘서 새로 들어오는 주주 (보유)주가를 반토막 내거나 전체 주식 수를 늘려 인수 시도를 무산시키는 일종의 포이즌필과 같다. 미국에서 종종 쓰고 지금도 가끔 하고 있다”며 “그게 일부 주는 불법이고 일부는 합법이라 엇갈리는 판정이 나온다. 포이즌필이 가능하다면 적대적 인수합병은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익잉여금을 몽땅 털어서 자사주를 살 수 있게 해준다면 회사가 손해를 보면서 대주주만 경영권을 지키는 셈이 되니까 적대적 인수합병도 불가능해진다. 아울러 이번 자사주 취득은 주가를 높여 공개매수를 무산시킬 의도가 보이는데 그러면 자본시장법상 시세조종에 해당할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한편, 시장에선 재계의 경영권 방어를 위해 자사주 활용이 필요하다는 논리에 대해 반대로 적대적 인수합병이 불가능해졌을 경우 부작용을 거론합니다. 대리인 문제를 견제하는 기관투자자의 주권활동이 동력을 잃게 되고 시장 투자 매력 자체가 감소해 또다른 코리아디스카운트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이재영 선임기자 leealive@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오승훈 산업1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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