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권리’(right to know)가 상식으로 자리잡은 뒤, 그것의 긍정적인 효과를 부정적인 효과가 압도하고 있음을 여실히 깨닫는 요즘이다. 연일 터지는 유명인들의 사생활 폭로와 망신주기, 혹은 범죄혐의자들에 대한 무분별한 신상털기 등의 행태가 ‘알 권리’라는 이름으로 버젓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성은 지금껏 수없이 또 꾸준하게 제기되어 오고 있으니, 이 글에서 나는 ‘알 권리’가 본래 제기되었던 영역, 즉 공적인 것에 대한 ‘알 권리’에 집중해보고자 한다. 기본적으로 ‘알 권리’란 모든 것을 다 알 권리가 아니라, 나에게 구속력을 갖거나 영향을 미치는 어떤 (대부분은 공적일) 사안이나 결정에 참여하기에 충분한 정도의 정보를 알 권리이다.
며칠 전 열린 ‘채상병 특검법’ 및 ‘대통령 탄핵 청원’에 대한 청문회장을 가득 매운 카메라 렌즈, 청문위원들의 뒷자리에서 노트북으로 모든 말을 받아적는 기자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비추고 있는 실시간 방송 카메라들은 분명 그러한 의미의 ‘알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거기 있는 것일 터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보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는 듯 말이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아무리 청문회나 상임위, 본회의나 대정부질문 같은 것이 생중계된다고 해서, 몇 시간이 넘어가는, 심지어 초미의 관심사는 못 돼도 시민들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법안이나 정책 등에 대한 그 수많은 지루한 회의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쳐다볼 수 있을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대안적으로는 언론인들이 주요 장면들을 편집해 보여주는, 보도의 형태로 그 회의들을 보는 방법이 있지만 그 경우 어쩔 수 없이 정보에 대한 취사선택이 발생한다는 문제가 있다. 전체 맥락이 없이 언론사에 의해 압축되고 편집된 몇몇 장면들을 보는 것이 정말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생중계된다는 사실 자체가 회의의 참여자들, 즉 정치인들의 행동 방식을 바꿔놓는다는 점이다. 모든 회의의 기본꼴은 의견을 교환하고 하나의 결론을 내기 위한 대화이다. 그런데 이렇게 모든 것이 보여지는 경우, 정치인들은 이를 눈에 띄는 말과 행동으로써 시민들의 이목을 끌고 지지자들의 인기를 모으는 기회로 삼는다. 지금과 같은 정치적 양극화와 대결 구도 속에서 이런 경향이 점점 심화될수록 정치인의 덕목은 얼마나 자극적인 말로 상대방을 공격하고 호통치느냐가 되고, 자극적인 눈요기 내지 볼거리만으로 정치는 가득 채워진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 의견 교환과 의사결정의 과정은 대화라는 기본꼴을 잃어버리고 관심에 목매는 정치인들의 독백과 퍼포먼스의 장이 되어버린다.
여러 스펙타클에 능했던 고대의 폭군들부터 휘황찬란한 배경과 꾸며진 모습으로 나타나는 독재자들,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해 친근감과 이미지로 승부하는 대중 정치인들까지, 볼거리를 통한 정치는 언제나 정치의 한 단면이었다. 지금의 정치가 뭔가 정상적이지 않아 보인다면, 우리는 한 번쯤 실험을 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정치와 관련된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도록, 즉 실시간 생중계를 하지 않아보는 것이다. ‘알 권리’가 반드시 ‘볼 권리’를 함축하지는 않는다. 시민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가려내고 전달하는 것은 개별 언론들이 아닌 민주적 통치의 마땅한 한 기능이어야 한다. 카메라가 없는 회의장에서, 과연 그럴 때도 정치인들이 지금과 같이 말하고 행동할까? 우리의 정치는 카메라 앞에서 벌어지는 지금처럼 나쁠까?
노경호 독일 본대학 철학박사과정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