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응급실에 존재하는 암묵적인 불문율 이야기가 나옵니다. 긴급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즐비한 응급실이 모처럼 한산하고 조용한 때가 있을텐데, 이럴 때 "오늘 한가하네"라는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응급 상황에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겠다는 말이겠지요.
최근 우리은행에서 터진 100억원대 직원 횡령사고 소식을 접하니 응급실의 불문율이 떠올랐습니다. 지난해만 하더라도 우리금융 내부에서는 새로운 회장이 오고 감사가 바뀐 이후에 몇달째 금융사고가 터지지 않았다는 안도의 한숨이 여기저기에서 들렸습니다.
직전 해에 전임 회장과 행장이 근무할 때 700억원대 횡령사고가 터지면서 곤욕을 치룬 바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내부통제 시스템이 잘 돌아가는 뜻이겠습니다만 과도한 자신감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찝찝한 뒷맛을 남겼습니다.
횡령·배임 뿐만 아니라 개인정보 유출이나 해킹 사고가 터졌을 때 금융사를 취재하다보면 사고가 터지지 않은 금융사들도 "다행이다"라는 말을 아낍니다. 경쟁사의 사고를 빌어 흠을 들추려지 않으려는 '상도' 일수도 있고, 어느 누구도 무사고를 자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은행 입장에서는 2년 전 700억원대 사상 초유의 횡령사태로 내부통제에 심각한 구멍을 드러냈다가 또다시 거액의 횡령사고가 발생했으니 난감한 상황입니다. 임종룡 회장 취임 이후 우리금융은 내부통제 체제 개편과 임직원 인식 제고, 역량 강화를 골자로 한 '내부통제 혁신방안'을 대대적으로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그룹 차원에서 전사적으로 추진해온 내부통제 강화 노력이 1년이 채 안돼 무색해졌습니다.
은행권의 굵직한 금융사는 올 들어서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NH농협은행에서는 지난 3월 부동산 담보 가격을 부풀려 과다 대출을 내준 100억원대 배임사고가 터진데 이어 두 달 만인 지난달 총 64억원 규모의 배임사고 2건이 또 발각됐습니다. KB국민은행에서도 100억원 규모의 대출 관련 배임사고가 발생한지 한 달도 안 돼 배임사고가 2건 더 터졌습니다.
고객들이 믿고 돈을 맡기는 금융사는 다른 어느 기업보다 신뢰를 우선으로 합니다. 무사고가 어느정도 이어진다고 경영진의 공이 되고, 사고가 터지면 직원 개인의 일탈을 어떻게 막느냐며 공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조단위의 상생금융 지원금을 내면서 고객 신뢰를 잃어버리는 악수를 둬서는 안됩니다. '내부통제 강화'가 말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때입니다.
이종용 금융산업부 선임기자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의중 금융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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