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현의 바위그림)밤에 살아난 형상들과 조우하다
(백야의 땅, 박성현의 바위그림 시간여행-24)
2024-05-14 06:00:00 2024-05-16 08:13:28
 
북극 아래에 위치한 페노스칸디아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핀란드, 러시아의 콜라반도와 카렐리야 지역을 가리킵니다. 세계 곳곳에서 선사 인류의 바위그림이 발견된 것처럼, 이곳에도 수천 년 전 신석기인들이 남긴 바위그림이 있습니다. 그들은 물가의 돌에 무엇을, 왜, 새겼을까요?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질문을 품은 채 떠난 여정, 러시아 카렐리야의 오네가호수와 비그강, 콜라반도의 카노제로호수에 새겨진 바위그림과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를 향해 가는 시간여행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돌섬의 주인들’을 지키는 야생 속 박물관 사람들
 
“여기서 바라보면 저기 멀리 히비니도 보여요. 날씨가 맑으면 겨울에 산에서 스키 타는 사람들도 보이지요.” 박물관 경비근무자의 베이스캠프인 코르돈의 부엌에 앉아 있던 아나톨리 씨가 창문 너머를 가리키며 말했다. 히비니는 콜라반도에서 가장 큰 산맥으로 지질학적 나이가 약 3억 5천만 년 이상으로 간주되는데, 창밖 호수 너머 멀리에 작지만 정말 그 모습이 보인다. 근무기간 동안 혼자 코르돈에서 지내는 아나톨리 씨는 쉴 때 그곳을 멍하니 바라보며 사람 구경을 한다고 했다. 그는 움바마을의 박물관에서 보내는 물품을 니지마강의 약속장소에서 받아와 카멘니섬에 전하고 수시로 코르돈과 카멘니섬을 오갔다. 직접 잡은 생선을 카멘니섬 근무자에게 갖다 주기도 했다. 카노제로 암각화 보호구역 박물관이 생길 때부터 일했던 그는 은퇴했다가 인력이 모자라 박물관의 요청으로 다시 근무하게 됐다고 한다. 외진 곳에서 고독하게 일해야 하는 조건이니 인력이 부족할 만해 보인다.
 
코르돈에서 카멘니섬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박물관 직원 바짐 씨(좌)와 아나톨리 씨(우). 손에 들린 박물관 표지판에 '암각화 단지 - 기원전 2-4세기 바위그림'이라 쓰여 있다. 사진=박성현
 
코르돈에 갈 때는 바짐 씨가 노를 저어 작은 고무보트로 갔지만 배에 문제가 있어 그 배로 다시 거친 물살을 뚫고 이동할 수는 없었다. 결국 아나톨리 씨가 모터보트로 바짐 씨와 나를 카멘니섬에 데려다 주기로 했다. 고무보트에 비하면 이 모터보트는 고급승용차다. 마찬가지로, 전원을 사용할 수 있고 통신이 가능한 코르돈의 숙소는 카멘니섬의 경비원 숙소에 비하면 호텔인 셈이다. 하지만 코르돈이나 카멘니섬이나 혼자서 외롭게 근무해야 하는 건 같다. 카노제로 암각화 보호구역에서 근무하는 박물관 사람들은 카멘니섬(‘돌섬’)에서 수천 년 전부터 살아온 암각화의 형상들, 즉 ‘돌섬의 주인들’을 지키는 파수꾼이라 하겠다. 모터보트로 20분 남짓 달리니 카멘니섬이 보인다. 밤 11시가 넘었지만 백야인 하늘과 먹구름 속 거친 카노제로호수를 건너 아나톨리 씨는 다시 자신의 코르돈으로 돌아갔다. 
 
코르돈에서 카멘니섬으로 돌아오는 길. 먹구름 낀 백야의 호수 위에 카멘니섬이 보인다. 사진=박성현
 
카멘니섬에서 머무는 며칠 동안 원래 계획과는 다르게 상황이 흘러갔다. 보호돔에 있는 암각화 외에도 카멘니섬의 나머지 암각화 그룹과 다른 섬들의 바위그림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박물관 측에서는 다른 섬으로의 암각화 견학이 일정에 포함된다고 말했었지만 막상 섬에서 근무하는 바짐 씨와 논의가 된 것 같지는 않았다. 카노제로 암각화의 연구자이기도 한 그의 안내가 없으면 암각화 위치를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게다가 배를 타고 이동하지 않으면 다른 곳의 암각화들은 볼 수가 없는 처지다. 나는 매일 바짐 씨가 안내해 주길 기대했지만, 낮에는 그가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안내하느라 바쁘니 요청하기가 어려웠다. 저녁 시간의 경우, 첫째 날에는 함께 코르돈에 다녀왔고 둘째 날엔 그가 아팠다. 셋째 날엔 바짐 씨와 아나톨리 씨가 코르돈에 갔고 다음날인 넷째 날에 돌아와 안내를 해 주겠다고 했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돌아오지 못한 것인데, 다음날 날씨가 점점 나빠졌기 때문에 못 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는 바짐 씨의 친구로 섬에 머물고 있던 또 한 명의 방문자 드미트리 씨와 함께 세상사 얘기를 나누며 전화도 안 되는 섬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분명 암각화를 볼 목적으로 왔는데 야생의 자연이 다른 상황으로 몰고 간다. 이곳을 거쳐 간 고대인들의 처지는 어땠을까?
 
카멘니섬 경비근무자의 취사 및 식사 공간 겸 초소. 파견된 박물관 직원의 근무환경이 야영생활과 흡사하다· 사진=박성현
 
한밤중에 살아난 바위그림 속 형상들
 
둘째 날은 너무 추운 날씨라 바짐 씨가 보호돔 안에서 잘 수 있게 배려해 주었다. 관람객들이 밟고 다니는 나무통로 바닥에 침낭을 깔고 잤는데, 암각화의 등장인물들이 꿈속에 찾아와 영감을 주지 않을까 몹시 설레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암각화의 주인공 대신 래프팅객들이 자정 넘어 들이닥쳐 암각화를 보겠다는 핑계로 재워달라고 소란을 피우다가 떠났다. 경비를 서는 동안 이런 일은 처음이라 했다. 내가 안에 있는 걸 보게 되면 혹여 그런 일이 또 생길까봐 이후 보호돔 안에서 자지는 않았지만, 셋째 날 밤 바짐 씨가 빌려주고 간 충전식 LED 랜턴을 사용해 밤새도록 보호돔 안의 바위그림들을 살펴보았다. 낮에는 잘 보이지 않던 형상들이 한밤중 랜턴 불빛에 의해 살아나기 시작했다. 스키 자국과 스키 폴 자국, 동물의 것으로 추정되는 발자국이 선명하다. 남녀 구분이 가능하게 신체 묘사가 된 사람들의 형체도 보인다. 비그강 암각화의 사람 형상이 종종 머리 장식에 화살과 활을 곁들였다면, 카노제로 암각화의 인간은 보다 단순하고 도식적으로 묘사돼 있다.
 
카멘니 그룹 7의 일부. 발자국과 스키 자국, 배, 십자 모양 등 여러 형상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이하, 모든 사진은 야간촬영) 사진=박성현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낸 동물 중에는 안내판에서 비버와 바닷새 아비(阿比)로 해석해 놓은 이미지도 있다. 일단 ‘비버’와 ‘아비’라고 추정한다면, 내려다 본 형태의 비버는 네 개의 발가락이 있는 발과 넓고 긴 꼬리를 가진 모습이고, 아래에서 올려다 본 날고 있는 아비는 긴 다리와 긴 목, 깃털 있는 날개를 쭉 뻗고 있는 모습인데 둘 다 묘사가 섬세하다. 비버의 양 옆으로 여러 명이 탄 배들이 보이고 아비의 옆에는 동물 발자국과 스키 자국이 표현돼 있다.
 
카멘니 그룹 7의 일부. 비버로 추정되는 동물. 사진=박성현
 
카멘니 그룹 7의 일부. 바닷새 아비로 추정된다. 사진=박성현
 
궁금증을 자아내는 형체들도 눈길을 끈다. 그중 하나가 엘크 머리로 장식된 다인승 배에 7명이 타고 있고 뱃머리에서 위쪽으로 커다란 곡선 형태의 이미지가 뻗어 나간 그림인데, 안내판은 이 기묘한 곡선 형태를 작살에서 줄이 풀린 것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고고학자 콜파코프와 슘킨의 책 ‘카노제로 암각화’(2012)에는 “동물 형태의 높은 뱃머리, 앞뒤로 튀어나온 용골, 뒤로 구부러진 선미 기둥, 선체 위에 7개의 돌출부, 배에서 위쪽으로 뻗어 있는 ‘미로’를 가진 배”라고 쓰여 있다(207쪽). 최대한 객관적으로 기술한 설명에서―따옴표를 붙이기는 했지만―‘미로’로 표현한 것이 흥미롭다. 솔로베츠키 제도 볼쇼이자야츠키섬의 돌미궁과 칸달락샤의 돌미궁이 떠오르지 않는가! 배의 아래쪽에는 고래로 보이는 동물이 새겨져 있다. 
 
7명이 탄 배의 뱃머리 위로 특이한 곡선 형태가 뻗어 있는데, 작살에서 줄이 풀린 것으로 보는 해석과 '미궁'으로 표현한 의견이 있다. 사진=박성현
 
호기심을 자극하는 또 다른 그림은 십자 모양의 형체다. 팔꿈치를 구부려 두 손을 위로 들고 무릎을 구부린 채 두 다리를 쩍 벌린 인간 형상 옆에 커다란 십자 모양이 두 개 보인다. 손가락을 활짝 펴고 큰 손을 위로 치켜든 의인화 형상에게 주어지는 ‘악마’라는 별명이 이 인물에게도 붙어 있다. 그의 남근은 꼬리로도 보이게 묘사돼 특이하다. 가장 궁금한 것은 두 개의 십자 형상인데, 이것이 의식을 행하는 도구인지 뭔지 알 수가 없다. 그림의 전체적인 분위기상 상징적인 것이 아닐까 추측할 뿐이다. 그 밖에도 여러 인간 형상과 카노제로 암각화의 대표 주제인 작살 고래사냥 장면을 볼 수 있다. 배에 탄 것이 아니라 단독으로 묘사된 사람의 경우 남근과 여성의 외음부가 항상 묘사되고 팔과 다리를 구부려 넓게 벌린 형태가 전형적이다. 창을 든 사람 모습도 보인다.
 
십자 모양 형상과 두 손을 위로 든 인간 형상. 사진=박성현
 
'여자를 붙잡고 있는 악마'라는 설명이 쓰인 암각화 안내판(좌)과 필자가 촬영한 실제 모습(우). 안내판에서 위치를 '남서'로 표기한 것은 오류로, 이 형상은 바위의 북서쪽에 있다. 사진=박성현
 
의인화 형상과 사미족의 ‘사슴인간 먄다시’ 신화 
 
의인화 형상에서 눈에 띄는 두 그림을 살펴보자. 먼저, ‘여자를 붙잡고 있는 악마’라는 제목을 붙여 놓은 그림인데, 생식기상 남성으로 묘사된 한 인물이 무릎에서 구부러진 다리로 서 있다. 오른손은 손가락이 3개고 양손은 정체가 불분명한 뭔가를 든 상태다. 안내판에 ‘여자를 붙잡고 있는’ 것으로 쓰인 이유는 그의 오른쪽 어깨 위에 여자 형체가 있기 때문이다. 고리 모양의 머리를 가진 이 여자 형상은 구부린 팔에, 손가락이 각각 4개씩인 양손을 늘어뜨리고 역시 구부린 다리를 벌린 채 서 있다. ‘악마’가 여자를 잡고 있다기보다는 둘 사이의 연관성과 상징성이 있어 보이는데, 남자의 손에 들린 물체를 알아야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듯하다.
 
타원형 머리를 가진 의인화 형상의 옆모습으로 도끼-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다. 그의 앞에 있는 까마귀는 잘 보이지 않는다. 사진=박성현
 
다른 그림은 카노제로 암각화의 대표적 이미지 중 하나로, 타원형 머리를 한 의인화된 존재의 옆모습이다. 그는 팔을 앞으로 뻗어 위로 들고 있는데 도끼-지팡이를 손에 쥐고 있다. 두 다리는 약간 구부러지고 남근이 크게 묘사돼 있다. 형상 자체도 크다. 안내판에는 “엘크 머리 모양의 도끼-지팡이와 까마귀를 가진 마법사”라고 써 놓았다. 까마귀는 신화 속 단골 캐릭터다. 이 인물의 타원형 머리는 동물을 연상시키고 몸도 독특해 반인반수의 느낌이다. 문득 ‘사슴인간 먄다시’ 신화를 떠올리게 된다. 사미족의 토템, 즉 조상으로 간주되는 먄다시는 ‘노아이디’(러시아에선 노이다)로 불리는 사미족 샤먼이 야생사슴 암컷으로 변해 낳은 아들이다. 자신의 아버지가 사슴(순록)임을 알게 된 먄다시는 툰드라로 들어간다. 먄다시는 사람들에게 사냥 기술을 가르치고 활을 주었으며 암사슴을 죽이는 것을 금했다고 한다. 다른 버전에서는 그의 어머니가 인간으로 변할 수 있는 사슴처녀로 나오기도 하는데, 어느 버전이든 사미족과 순록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보여주는 신화라 하겠다.
 
‘사슴인간 먄다시’ 신화. 자료 출처: 차르놀루스키(В. Чарнолуский), ‘사슴인간’. 1960년대. 무르만스크주 향토역사박물관(МОКМ) 소장품.
 
박성현 경상국립대 학술연구교수 perceptio@hanmail.net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나볏 테크지식산업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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