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소행성 충돌이나 대홍수처럼 ‘한 순간의’ 멸망이란 이미지를 갖고 산다. 실제로는 어떨까? 인류 멸망보다 좀 더 작은 규모를 먼저 생각해보자. 역사 속 멸망이란 흔히 몇몇 극적인 사건들로만 기억되곤 한다. 그러나 그것은 순간적인 ‘절멸’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경우 원래의 특정한 생활상이 급변해 세계사적 관점에서 다루어질 만큼의 특별함을 잃는 것을 뜻하는 것 같다. 고전기 아테네의 ‘멸망’은 더 이상 한 도시국가가 민주적으로 운영되지 않게 된 것을, 청나라의 ‘멸망’은 전제왕조가 공화국으로 변한 것을 뜻할 따름인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멸망은 개인의 차원에서 체험되기에는 너무나도 느린, 장시간에 걸친 변화이다. 민주정부가 무너진 아테네의 시민들은 그 시절을 추억하며 자녀들에게 “예전엔 사람들이 저 수풀만 무성한 프닉스 언덕에 모여 도시의 향방을 스스로 결정하곤 했단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멸망이 본질적으로는 어떤 변화라면, 기존의 생활방식을 떠받치던 사회구조, 국가, 문명이 멸망해 사라졌다고 해서, 개인의 관점에서 그 전과 후를 비교해 무엇이 더 좋았는지를 평가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것이다. 민주정부가 없는 아테네에서도 삶은 계속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멸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은 멸종해버린 ‘핀타섬땅거북’의 최후의 개체였던 ‘외로운 조지’는 100년을 살다가 자손 없이 2012년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외로운 조지’에게 자신의 죽음이 과연 자기 종의 멸종으로서 체험되었을까? 그랬을 리 없다. 물론 수많은 개체가 서식지가 줄어들고 사냥에 시달리거나 짝을 찾지 못하는 등의 어려움을 겪었겠지만, 그것은 개체의 관점에서는 자기가 처한 불행한 일들일 뿐 종의 멸종으로는 체험되지 않는다. 개체 혹은 개인이 체험하는 것은 멸종이 아니라 오직 동료들의, 너의,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의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인류,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이 대한민국의 상황에다 적용해보자. 인구위기와 기후위기가 겹치면서, 아마도 후세대들의 생활은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변할 것이다. 인구소멸이 오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기능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을까? 기후위기에 따라 먹고 입고 거주하는 그 모든 것이 달라질 수도 있고, 어쩌면 국가(state)라는 형태의 집단협동 역시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변화이고 삶은 그 속에서도 계속될 것이며,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갈 후세대가 우리에 비해 불행할 것이라 단언할 수도 없다. 요컨대, 멸망이라는 이름의 그 오랜 시간에 걸친 변화는 우리의 개인적 체험의 범위를 넘어서있다.
그렇다면 인류의 멸종이나 대한민국의 소멸 대신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가 쌓인 끝에 동료 시민들게 닥친 위기들이다. 지금 기후재난, 전쟁, 가난과 불평등으로 죽어가는 한 개인의 죽음이 인류 최후의 개체의 죽음이라는 멸종의 극적인 순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괜찮은 것일 리 없다. 이러한 위기 자체인 ‘현재’를 잘 관리하여 더 큰 멸망만은 피하자는 계획은 얼마나 오만한가? 우리기 윤리적이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 곁의 동료 시민들을 위해서이다. 미래의 멸망은 체험되기에는 너무 큰 반면, 그들은 바로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이 궁극적으로는 멸망을 피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
노경호 독일 본대학 철학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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