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 남국, 래경, 은경 등등. 국민정서법을 어기고 쓰러지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많다. 이후 누가 또 더 쓰러질 것인가? 이미 쓰러진 사람들은 왜 쓰러졌을까? 안타깝게도 나중에 쓰러진 사람들은 먼저 쓰러진 사람들이 왜 쓰러질 수밖에 없는지 그 배경을 고민한 흔적이 없다.
그들은 먼저 쓰러진 이의 약점이 무엇이고 어떻게 개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지 않았다. 즉, 반성과 성찰의 학습효과가 거의 없어 보인다. 원인 진단과 처방이 없는 한 쓰러지는 이는 더 나올 것이다. 쓰러진 이들은 대체로 국민정서법과 국민상식을 어겨서 무너진 것은 아닐까? 국민과의 공감과 소통에서 무능했던 것은 아닐까? 그들은 공감능력의 부족, 국민상식의 부족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386 운동권그룹’을 정치권에 영입하면서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을 결합시켜 실용주의자가 돼라”고 주문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이것을 결합시키는 데 실패했다. 왜 실패했을까? 아마도 86세대 정치인들은 선악의 이분법에 따라 소중화적 위정척사론으로 무장하여 상인을 천대했던 조선 사대부의 습속을 닮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조선 사대부들이 숭상했던 유교와 성인군자론에서는 자유와 평등 및 민주주의의 습속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국민과의 공감과 소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여러 대안이 있겠지만 정서가 문제가 된 만큼,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서 힌트를 얻는 게 적절하다. 스미스는 그동안 시장에 대한 규제를 무제한으로 철폐하자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아버지로 왜곡된 바 있다. 하지만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의 핵심인 도덕적 감정에 따라 인간의 이기심을 제한하여 탐욕적인 시장경제를 규제하자고 주장한 도덕철학자이다.
아담 스미스는 도덕과 법은 칸트처럼 엘리트의 ‘이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상인처럼 타인과 교류하고 상호작용하면서 나오는 동감의식(sympathy)의 결정체인 ‘도덕감정’에서 나온다고 봤다. 스미스는 도덕감정이라는 ‘보이지 않는 손’이 견제와 균형을 통해 자생적인 자유질서와 민주적 시장경제를 일으켜서 국부가 만들어 진다고 봤다. 이런 아담 스미스의 시각은 ‘자유주의적 공화주의자’로 보는 게 적절하다.
그렇다면 결국 586세대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사대부 습속과 같은 엘리트적 이성에 갇혀 국민정서와 상식을 파괴한 만큼, ‘칸트형 이성시민’에서 ‘아담 스미스형 공감시민’으로 내려갈 필요가 있다. 조선 사대부처럼 위에서 계몽하고 가르치려고만 하고, 현장 상공인들의 정서를 배우고자 내려가지 않는다면 국민정서법을 어겨서 쓰러지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올 수밖에 없다. 도덕감정론의 입장에서 다음을 반추해 봐야 한다.
민주화 시절엔 기득권 타파를 주장하다가 자신들이 정권을 잡은 뒤 도로 기득권에 빠지는 ‘내로남불현상’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혹시 그들이 사용했던 민주화 규범은 권력장악을 위한 명분이고, 실제는 사대부들이 쓰던 ‘입신양명’의 유교적 출세규범이 아니었을까?
그 입신양명 규범이 자신들을 부모찬스, 출세주의, 불공정 그리고 권력남용의 늪에 빠지도록 명령하지는 않았을까? 그래서 결국 가족주의적 연줄(혈연, 지연, 학연, 계파, 족벌, 관벌, 군벌, 파벌, 운벌, 노벌)을 동원하도록 유교식 행복기준인 입신양명으로 살아왔던 것은 아닐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달라져야 한다. 유교적 습속에서 환골탈태하는 586의 재민주화가 필요하다.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