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살짜리 소년이 썰물에 휩쓸려 표류된다. 안간힘을 다해 헤엄치지만 이미 육지에서 너무 멀어졌음을 깨닫는다. 소년은 몸에 힘을 빼고 물 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본다. 그것은 소년이 포기하고 절망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소년은 희망으로 가득해 힘을 비축하는 중이다. 소년의 희망이란 대체 무엇일까?
출생신고서가 없어 자기 나이를 정확히 모르는 켐프턴 번턴은 국보 도난죄로 법정에 서 있다.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해 나폴레옹 시대를 저물게 한 아서 웰즐리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를 훔친 혐의다. 그 초상화는 1961년 미국의 어느 수집가에 낙찰된 것을 영국 내무부가 특별보조금까지 출연해 국립갤러리에 전시한 작품이다. 영국 내무장관은 이 작품을 두고 ‘철의 공작은 영국의 국민성을 구현한다’며 14만 파운드를 낼 가치가 충분했다고 인터뷰한다.
“정부가 이 그림에 큰돈을 지불한다기에 제가 계산해봤죠. 그 돈을 10% 이자를 받는 은행 계좌에 넣으면 1년에 3,500가구의 TV 수신료를 지불할 수 있고 그 모든 사람들을 다시 연결할 수 있어요.”
당시 번턴은 BBC 방송의 수신료 징수에 반대하며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한 무료 텔레비전 운동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 일로 교도소에 수감되기도 한 그는 국가와 시민들에게 이 운동의 취지와 필요성을 호소하기 위해 기꺼이 사건의 주인공이 되었다.
여기서 번턴이 말한 ‘연결’은 무엇인가. 그는 그것을 ‘나는 너, 너는 나’라고 표현한다. 내가 나인 것은 너의 덕이고, 너가 너인 것은 나의 덕이라는 말이다. 신영복 선생님에 따르면 그것은 ‘감어인(鑑於人)’이다. 『묵자』에 나오는 글귀로 감어인 앞에는 ‘무감어수(無鑑於水)’가 있다. 물에(於水) 비추어 보지 말고(無鑑) 사람에 비추어 보라(鑑於人)는 뜻으로, 물에 비추면 사람의 외모만 보이지만 사람에 비추면 인간의 품성이 보인다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주변 사람들을 보면 된다. 신영복 선생님은 이 맥락을 확장해 ‘개인의 인성은 공동체의 인성’이라고 했다. 인성은 배타적으로 자신을 높여나가는 어떤 능력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여러 개인이 더불어 만들어내는 장(場)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성의 고양은 곧 사회성의 고양이 된다.
“나 혼자서는 벽돌 하나예요. 벽돌 하나로 뭘 하겠어요? 하지만 여러 개를 쌓아올리면 건물이 됩니다. 건물이 생기면 그늘이 생기고요. 이미 세상을 바꾼 거예요.”
뭐라고? 순진한 14살짜리라면 몰라도 저걸 머리가 허옇게 센 사람이 믿는다고?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 14살짜리 소년이 바로 번턴이었으니까. 바다에 떠 있을 때, 어린 번턴은 생각했다. 누군가 바위에 벗어놓은 내 옷을 보고 상황을 짐작해 구조를 하러 올 거라고. 구명보트는 한 시간 뒤 도착했다. 그 누군가는 번턴이 모르는 어느 우유배달부였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우유배달부가 그랬듯 이제 번턴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구명보트를 보내려 하는 것이다.
최근 끔찍한 사건들로 안타까운 희생들이 너무도 많았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가해자의 범행동기나 사이코패스 기질만이 아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개인의 인성이 바로 우리 공동체의 인성이라는 점이다. ‘나는 너, 너는 나’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비추어보면 그들의 얼굴에 우리의 얼굴이 투영된다. 우리가 바위 위에 놓인 옷을 지나치지 않았더라면, 옷을 보고 상황을 짐작했더라면, 끝내 구명보트를 보냈더라면.
번턴의 재판은 1965년에 열렸는데 TV 수신료 면제는 2000년에야 이루어졌다. 그것 하나도 35년이 걸렸다. 우리에겐 어느 만큼의 시간이 필요할까. 구명보트가 오긴 올까.
이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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