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뜩 찌푸렸던 지난 29일. 부산 해군 작전기지 하늘 아래 펄럭이는 '욱일기'의 붉은 태양무늬는 퍽 선명했습니다. 욱일기를 선미에 게양한 군함은 해상자위대 호위함 하마기리함. 한국이 31일부터 주최하는 다국적 해양차단 훈련 '이스턴 앤데버23'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자위함대 중 한 척이었지요.
이번 훈련에 일본 자위함대가 참가를 결정하면서 일찌감치 국내에서는 일본 함대가 욱일기를 게양하고 입항할 것인지가 관심이었습니다. 욱일기 자체가 가지는 의미는 물론이거니와, 직전 정부인 문재인 정부가 2018년 11월 한국 해군 주최 국제관함식에 해상자위대를 초청하면서 일장기만 게양할 것을 권고했으나 일본이 욱일기 게양을 고집하는 바람에 무산된 예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욱일기는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이자 한국을 침탈한 일본제국주의의 상징이라는 것은 전 세계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1870년 일본제국 육군기로 처음 사용된 욱일기는 1889년 해군기로 채택된 이래 러일전쟁·만주사변·중일전쟁·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탐욕적 제국주의 전선 곳곳에서 휘날렸습니다. 1945년 일본 패망과 함께 제국군이 해체되면서 내려졌으나 1954년 자위대 창설과 함께 부활됐고, 과거 패권주의 망령이 깃든 일본 극우세력이 지금도 독도 영유권 주장과 일제 강점기 역사를 부정하며 일본 군도처럼 휘두르고 있는 것이 현실. 역시 1945년 패망한 독일이 나치의 하켄크로이츠를 이후 영구적으로 폐기한 것과 사뭇 비교됩니다.
이런 역사를 한국 정부, 특히 국방부 역시 알 법도 한데 이에 대처하는 자세는 매우 의아했습니다.
"(자위함기와 욱일기 두 깃발이) 형상은 비슷하지만 자세하게 놓고 보면 차이가 있다."(이종섭 국방부장관. 2022년 10월31일.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
"자위함기와 욱일기는 조금의 차이는 있긴 하다."(전하규 국방부 대변인. 2023년 5월25일. 국방부 정례브리핑)
주무 장관과 대변인 입에서 나온 이 말들은 7개월 간격이 있지만 일관됩니다. 자위함기와 욱일기는 다르다는 한국 정부의 공식 입장인 겁니다. 문재인 정부 때 자위함에 매달려 있던 깃발이 윤석열 정부 때라고 달라지지는 않았을진대, 국내 일부 언론도 '욱일기와 흡사한 자위함기', '욱일기 모양의 자위함기'라 따라 부르는 상황. 그렇다면, 일본도 그럴까.
자위함대의 이번 방한을 보도한 <요미우리신문>, <아사히신문>, <마이니치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산케이> 등 일본의 5대 일간지는 하나같이 "자위함대, '욱일기' 게양하고 부산 입항"이라고 대서특필했습니다. 일본 스스로 '너희 부산항에 휘날리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욱일기'라고 자인한 것을 한국 정부만 욱일기가 아니라고 하는 참 요상한 풍경입니다. 그 덕에 '외국항에 입항한 함정은 소속 국가 국기와 군대 깃발을 다는 것이 국제적 통용사항'이라는 나름 합리적 설명은 참 쑥스럽게 됐습니다.
문재인 정부 때 얼어붙었던 한일관계가 급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자랑이라면, 국제적 관례임을 들어 한국 국민이 너그러이 양해해 달라는 말을 우리 정부가 일본으로부터 이끌어 냈다면 어땠을까.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은 그런 노력 조차 없었으니 '굴욕외교', '호구외교'라고 야단을 맞는 겁니다. 이런 지적까지 야당의 정치적 호도라며 외면하면 답이 없겠습니다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입니다. 5월30일치 <요미우리신문>의 '해자함 욱일기 들고 부산으로…정부 방침 전환 6년만'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는 "이번 입항으로 욱일기 문제는 사실상 해소된 셈(今回の入港で旭日旗を巡る問題は事實上解消されたことになり)"이라고 보도했으니. 이후 더욱 노골화 될 욱일기의 진격을, 우리 정부는 또 어찌 감당할 지 참 걱정입니다.
최기철 법조기자·미디어토마토 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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