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언론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있다. 그 명명(命名)을 대략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한국 언론이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알 수 있다. 언론이 왜 국민들에게 신뢰를 잃고 있는지도 조금 이해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신문은 ‘친일지’와 ‘민족지’가 있었다. 민족지는 일제에 의해 폐간되었지만,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거나 일제의 전쟁을 미화하며 민족을 고통에 빠뜨렸던 친일지들은 살아남았다. 친일지들은 100년이 지나도록 반성·사과를 하지 않았고,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지금도 번성하고 있다.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오랜 독재정권과 경제개발 시기를 겪으면서 언론은 ‘정론지(政論紙)’와 ‘대중지(大衆紙)’란 이름으로 불리웠다. 정치·경제적으로 혼란했던 시기에 ‘주로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신문인 정론지와 대중의 다른 일상적 관심거리를 다루는 대중지가 있었다.
김대중 정부로 첫 정권교체가 이뤄지기 전까지 50년 가까이를 권위주의 정치세력이 정당의 이름만 바꿔가며 집권하다 보니, 여당과 야당은 늘 정해져있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독재정권 세력과 한몸이 되었던 ‘여당지(與黨紙)’와 만년 야당 민주당을 지지하는 ‘야당지(野黨紙)’가 있었다. 독재정권 시기 여당지들은 거의 대부분 권력 감시견의 역할을 포기한 ‘친정부 신문’이었다. 독재정권으로부터 탄압받으면서도 진실을 폭로한 몇몇 야당지들은 국민의 신뢰와 지지를 받았다.
이른바 ‘87년 체제’가 시작면서 ‘진보 언론’이라는 이름의 신문이 태어났다. 권위주의 시대에 인권·평화·평등·통일·민주주의 같은 진보적 가치를 앞세운 신문이었다. 자본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국민주 신문’, ‘독립언론’이기도 했다. 재벌 대기업에 인수되지 않고 사원들이 주식을 사들여 주인이 된 ‘사원주주 신문’도 있다. 이와는 달리 재벌대기업 소유거나 부자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재벌언론’ ‘부자신문’도 있다. 최근에는 건설회사들의 언론사 인수가 늘어나 ‘토건 언론’이란 이름도 생겨났다. 재벌과 건설회사가 소유한 언론이 기업은 물론이고 정치권력에 비판적 기사를 쓰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조폭언론’은 부끄러운 언론의 별명이다. ‘자기네 영역(이익)을 지키기 위해 인정사정 보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행태가 조폭과 비슷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일부 거대 언론의 패륜적이고 폭력적인 보도 탓에 ‘언폭’이란 이름도 탄생했다. ‘친000 매체’처럼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 정권에 호의적인 논조의 매체에 붙여진 별칭도 있다. 그에 반해 ‘대안언론’이나 ‘대항언론’은 전체 언론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이 커지면서 나온 호칭이다. 국민 혹은 시민의 편에 서기 보단 권위주의 정권·기득권의 편에 서는 언론에 ‘대항’하고 ‘대안’을 찾기 위해 생겨난 언론이다.
요즘은 ‘진보매체’와 ‘보수매체’라는 이름이 흔히 쓰인다. 그런데 이 이름은 그동안 만들고 불려진 언론의 여러 가지 이름 가운데 가장 부적절하다. 이른바 ‘진보매체’는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보수매체’라는 이름은 더 심한 오명(誤名)이다. 오명(汚名)이기도 하다. 보수의 가치란 부패와 반칙이 아닌 청렴과 공정한 법치를 좇는 것인데, 보수언론은 그러한가? 반공주의와 친일·친미 사대주의에 갇혀 변화를 두려워하고 제 이익만을 챙긴다면 그것은 ‘보수언론’이 아니라 ‘수구언론’ 혹은 ‘극우언론’이라고 불러야 한다. 권력 감시를 포기했다면 그냥 ‘애완견 언론’이 더 적절하다. ‘진보’나 ‘보수’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실체를 가리려고 갖다 붙인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 요즘 언론에게 제 얼굴에 맞는 새 이름을 지어줘야 한다.
김성재 전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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