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이 싸웠어?”
“아뇨, 안 싸웠어요. 음... 싸운 건 아닐 걸요? 아닌가, 싸웠나?”
헷갈려하는 파우릭에게 콜름이 전해 준 절교의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그냥 이제 자네가 싫어졌어.”
그러니까 이유는 없다는 것이었다. 어제까지 절친이었는데 오늘 갑자기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그냥’ 싫어졌다고 했다.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가, 황당했다가, 어느 순간 화가 나는 게 당연지사. 그렇게 갑자기 틀어진 두 사람 때문에 마을 전체가 뒤숭숭해진다.
호수를 사이에 두고 건너편 땅에서는 매일같이 포탄이 터진다. 펑펑 소리가 날 때마다 이 쪽 땅에서도 진동이 울리고 포탄 연기로 코까지 매캐해지는 느낌이다. 내전은 저쪽에서 치르고 있는데 한없이 조용해서 지루하기까지 한 작은 섬마을 ‘이니셰린’에도 전쟁이 난 것 같다. 아니, 실은 전쟁이 맞다. 총알이 난사되고 건물이 무너져야만 전쟁은 아닌 것이다. 사람들 속에 미움과 증오가 생기고 그것이 대립과 분열을 낳아 어제까지 우정을 나누던 이들이 한 순간에 원수가 되면 그게 바로 전쟁이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사는 여기 이곳은 안전한 평화지대인가. 주말의 광화문, 시청일대 풍경은 어떤가. 사실 어떤 장소를 특정할 필요도 없다. 공간과 경계가 없는 SNS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총성이 울려 퍼지고 유혈이 낭자하다. 호형호제하며 그 집에 수저가 몇 벌인지도 알던 사람들이 지지세력과 정치견해가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손가락질과 욕설 끝에 서로를 차단하는 꼴을 자주 본다.
에포케(Epokhe)는 ‘판단을 보류한다’는 뜻의 그리스어이다. 어떤 현상에 대한 인간의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모든 확신을 거부한 채 판단을 유보하는 피론회의주의를 대표하는 말이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이 피로니즘을 통해 ‘상대성’과 ‘다양성’을 자신의 중요한 사상적 토대로 삼았다. 신념 있는 인간은 멋있다. 신념이 언어로 표현되고 실천으로 연결되는 사람은 그 신념의 옳고 그름을 떠나 세상을 감동시킨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신념이 변하지 않는 사람들이 나는 가끔 무섭다. 이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는 ‘모든 것은 변화한다’는 사실 하나뿐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부터 그렇다. 세월은 젊을 때 보이지 않았던 것들을 보게 하고, 이해되지 않았던 것들을 이해시켰다. 함부로 판단하고 평가하고 비난하는 것은 참으로 위험하고 몽매한 짓이었다.
“네 한심한 얘기를 듣고 있을 시간이 없어 파우릭. 무의미한 수다였어.”
“무의미한 수다가 아니라 평범하고 즐거운 수다였어요. 콜름 당신은 정말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다정함이 남아? 그런 건 세상에 남지 않아. 음악이 남고 그림이 남고 문학이 남는 거야. 남은 시간동안 나는 작곡을 할 거니까 더 이상 방해하지 마.”
“다정함은 남아요. 다정했던 우리 아빠를 내가 기억하고, 다정했던 우리 엄마를 내가 기억하고 있어요. 다정했던 당신을 내가 기억할 거예요.”
인간을 향하지 않은 신념을 선(善)이며 정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인간애가 빠진 신념은 자신을 망가뜨리고 타인을 무너뜨리며 종국엔 세상을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음악과 그림과 문학이라는 결과물만이 아니다. 그것들이 생성된 과정도 함께 남는다. 그래서 역사의 기록은 ‘기억’의 기록이다. 우리가 이 사실을 수시로 망각해서 숨어있던 ‘밴시’가 자주 세상에 등장하고 있다. 밴시는 죽음을 예고하는 귀신이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속에 나오는 밴시는 대한민국에도 있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들을 정확히 주시하고 있다. 다정함을 버리고 다정함을 기억하지 않는 우리들을.
이승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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