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결단했습니다. “최악의 관계로 만들어버린 한일관계를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결단”이라고 합니다. 박진 외교부장관은 “우리 주도의 대승적 결단, 우리 국민의 아픔을 보듬겠다는 의지의 표현, 해결의 끝이 아닌 진정한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윤대통령은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 배상 해법으로 ‘제3자 변제’를 선택했습니다. 일본 전범 기업은 빠지고, 한일 협정 청구자금으로 성장한 한국기업에서 기금을 마련하기로 했습니다. 이런 결정에 대한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미래지향적 결단의 모범으로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한다고 했습니다.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 총리대신이 한일 양국 간 불행한 역사를 극복하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과거사 인식을 포함한 11개 항의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하고, 부속 문서로 5개 분야 43개 항목의 '행동계획'도 채택합니다. 연 1회의 정상회담의 정례적인 개최 등 구체적인 실천을 약속했습니다.
그중에 한국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것은 ‘일본문화 개방’이었습니다. 당시 독립운동단체, 문화계, 종교계, 학계가 반대했습니다. 김대중은 대국민 설득 연설을 통해 소신을 알려 나갔습니다. 2002년 월드컵 한일 공동주최가 예정된 상태였고, 인터넷이라는 문명의 도구로 인해 국경의 의미가 점차 없어지고 있는 시대 상황에 대한 통찰이 있었습니다.
김대중은 “일본문화를 막음으로써 좋은 문화는 못 들어오고 나쁜 문화만 스며들어와서 폭력, 섹스, 이런 범죄의 문화들이 온다”, “21세기는 문화산업의 시대이며 더 이상의 문화 쇄국정책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적극적으로 설득해 나간 결과 일본문화 개방은 대세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한류, K-문화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김대중은 훗날 자서전에서 “공동선언은 많은 원칙과 구체적 행동 계획을 담고 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 총리의 대한국 사죄와 일본이 과거에 집착하기보다 미래를 보라”라고 조언한 결과라고 밝혔습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은 단순히 미래를 위해 과거를 덮어두자는 뜻이 아니라 양국의 실천약속이었습니다.
외교는 ‘상대주의’를 기본으로 합니다. 주고받는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은 경제와 안보를 이유로 일본과 협력적 관계로 나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신냉전’의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반공을 기치로 군사적 대결주의로 갔던 과거의 ‘냉전’의 시대에도 대한민국은 한미일 안보동맹을 맺은 일은 없습니다. 대만의 긴장관계, 북핵의 문제 등의 안보 현안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일본에 일방적으로 굴종적 한일관계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이번 윤석열 대통령의 결단은 일본에 대해 ‘정신 승리 선언’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일본은 단 한치로 양보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성의도 없습니다. 한국 국내의 결정이라고 반응도 공식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한 '위안부 합의'와 비교해도 너무나 굴욕적인 결과입니다. 당사자인 피해자 설득과 국민적 공감을 위한 토론의 과정이 빠진 체, 대통령의 일방적인 결정이었습니다.
대통령의 결단은 개인의 ‘고독한 결단’이 되면 안 됩니다. 국가 최고 책임자라는 대통령의 결단은 정치파트너인 의회의 동의를 구하고, 국가의 주인인 국민과 함께 공감대를 넓혀가는 설득의 과정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야 해결의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습니다.
김두수 시대정신연구소 대표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