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독
’(스포츠에서 우승이나 이길 확률이 적은 팀이나 선수를 일컫는 말
)의 반란은 언제나 즐겁습니다
. 이길 확률이라곤 눈꼽 만큼도 보이지 않던
‘언더독
’이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일궈낼 때 대중은 대상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며 짜릿한 쾌감을 느낍니다
. 그토록 많은 콘텐츠가
‘언더독
’의 반란을 담아내는 이유입니다
.
슬램덩크가 ‘더 퍼스트 슬램덩크’란 이름으로 돌아와 극장가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슬램덩크를 한 권도 읽지 않고 1990년대를 보낸 3450세대를 찾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들이 ‘더 퍼스트 슬램덩크’ 열풍을 이끄는 중입니다. 북산고 5인방(채치수, 정대만, 송태섭, 서태웅, 강백호)이란 한 마디에 3450세대는 5인방 생김새부터 성격까지 단 번에 떠올릴 수 있습니다.
슬램덩크 귀환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기대했을까요. 산왕공고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처음으로 두 손을 마주쳤던 서태웅과 강백호의 이후 얘기일까요. 아니면 주장 채치수와 안경 선배의 대학생활일까요. 그것도 아니면 새롭게 주장을 맡아 북산고를 이끌어갈 정대만의 얘기일까요. 무엇을 기대했든 송태섭이 주인공은 아니었을 겁니다. 송태섭은 그런 캐릭터였습니다. 날쌔고 경기력 좋고 인간적 매력도 있지만 조연이 더 어울리는 그런 캐릭터.
주장 채치수는 특유의 고릴라 카리스마, 천재 서태웅은 여심을 등에 업은 화려함, 천방지축 강백호는 단순 무식 열정과 단호한 결의, 불꽃 남자 정대만은 꺾이지 않는 의지. 각자만의 빛나는 포스가 있었지만 송태섭은 그들과 어우러져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투박한 조연이었을 뿐입니다.
그랬던 송태섭이 30여년 만에 ‘더 퍼스트 슬램덩크’ 주인공으로 돌아왔습니다. 채치수 정대만 서태웅 강백호가 아닌, 하다못해 또 다른 고교 스타플레이어 능남의 윤대협이나 해남의 이정환도 아닌 북산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켰던 송태섭이 주인공으로 찬란한 역사의 뒤를 이은 것입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는 송태섭의 남모른 노력이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서태웅과 강백호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을 동안 송태섭은 시선 밖에서 꾸준히 공을 튀기며 스스로를 갈고 닦았습니다. 버티고 버텼던 그의 진심이 비로소 공개되면서 글래머 한나 매니저의 환심을 사려 까불거렸던 지난날의 가벼움은 묵직한 감동으로 대체됐습니다.
설 연휴에 처갓집에서 장인장모에게 세배를 드렸습니다. 덕담을 듣기 위해 자리에 앉자 장인은 “올해도 잘 버티라” 당부하셨습니다. “승승장구 해라”도 아닌, “승진해라”도 아닌 “잘 버티라”는 덕담. 순간 정말로 송태섭의 스토리가 생각났습니다.
이젠 알 만한 나이가 됐습니다. 승승장구보다, 승진보다, 더 어려운 버티는 것. 버티는 건 아무것도 안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한 순간도 버티질 못합니다. 화려한 주인공으로 태어난 소수와 달리 대부분 조연으로 사는 보통의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버티기 위해 매 순간 죽을 힘을 다합니다. 그렇게 애를 쓰며 버티고 살다 보면 언젠가는 ‘언더독’의 반란이라 일컬어지는 순간도 경험하게 되고 자신만의 삶에서 주인공이 돼 송태섭처럼 분명 주목 받는 존재도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집으로 오는 길. 운전대를 잡은 채 피식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뭐 좋은 일 있어”라 묻는 아내의 말에도 계속 웃음만 지었습니다. 버티는 중이라 즐겁습니다. 올해는 이 즐거움을 더 갈고 닦자 다짐해 봅니다. 혹시 압니까. 제게도 그리고 우리에게도 언더독의 반란과 같은 날이 올지. 영광의 그 순간을 위해 올해도 힘차게 버텨봅시다. 우리 모두 파이팅.
김재범 대중문화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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