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북학파의 거두’로 불리는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에 ‘옥갑야화’라는 부분이 있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44세이던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잔치를 위한 조선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다녀오며 보고 들은 이야기를 남긴 기록이다.
독립적 이야기가 옴니버스식으로 구성돼 있다. 옥갑야화는 열하에서 베이징으로 돌아오던 중 옥갑이란 곳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박지원이 일행들과 주고받은 이야기를 서술한 것이다.
중국 상인을 속여 치부한 조선의 역관이 결국은 패가망신한 일화, 역관 홍순언이 창기로 팔린 여인을 구해준 행동으로 중국인의 신망을 모은 일화, 조선의 최고 부자로 유명했던 역관 변승업에 관한 일화, 소설형식의 '허생전' 등이 실려 있다.
옥갑야화에서 언급한 ‘조선 제일 부자’ 변승업은 중병에 걸리자 지금까지 자신이 고관대작을 비롯한 양반에게 빌려준 돈을 가늠하고 싶어 장부를 모아 놓고 계산을 했다. 은 50만냥 정도였다. 조선 중기 숙종과 영·정조 시절 한양 명동 기와집 규모 100칸짜리 가격이 2000냥이다. 당시 쌀값 등을 고려해 환산한 요즘 시세로 계산하면 대략 13억원 정도다. 은 50만냥은 요즘으로 따지면 대략 3250억원 가량으로 추산된다.
당시 조선의 경제력을 고려하면 요즘 시세로는 대략 100배는 훌쩍 넘는 32조원 이상으로 가늠된다.
이같은 거액을 아들이 거둬들이려 하자 변승업은 '놔두라'고 한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한꺼번에 금전을 회수하면 조선의 경제 규모상 돈줄이 막혀 ‘국가 금융위기’가 올 것을 우려한 탓이다.
둘째는 집안에 미칠 화근이다. 변승업은 권세가 높은 양반들에게 돈을 많이 빌려준 탓에 받으려 한다면 돌려받기는커녕 권세가들의 보복으로 집안에 화가 미칠 것이라고 강조한다.
명분은 금융 위기인데, 실제로는 ‘가문 보전’이 목적인 셈이다.
실제로 변승업은 숙종 때 여섯달 넘게 의금부 감옥에서 고생했다. '조선 부자 16인의 이야기'(이수광, 스타리치북스)에 따르면 인현왕후의 폐비와 복위를 거치면서 정권이 남인에서 서인으로 교체된다. 변승업은 서인들에게도 돈을 많이 빌려줬는데, 서인들이 정권을 잡자마자 돈을 갚기는커녕 감방에 보낸 것이다.
변승업은 숨을 거두기 전에 회계장부를 불태우라고 지시했다. 돈을 빌려간 이들 대부분이 남인, 서인을 따지지 않고 당대의 권력자였다. "돈을 갚기보다 너희를 죽이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떠났다.
새 정부가 들어서자 ‘현대 조선의 갑부’들이 앞다퉈 투자계획을 발표했다. 경쟁적으로 며칠 사이에 돈보따리를 서로 풀겠다고 나선 것도 처음이다. 금액만 해도 1000조원이 넘는다. 올해 우리나라 나라살림(본예산) 기준으로 1.5배가 넘는다.
‘조 단위 말잔치’에 대한 투자 이행여부는 일단 제쳐두자. 명분은 국가의 미래를 위한 대기업의 사회적 책무와 결단이라고 믿고 싶다. 그런데, 이상하다. 변승업의 유언이 자꾸 머리에서 맴도는 이유는 뭘까.
오승주 산업1부장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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