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의준 중소기업정책개발원 규제혁신센터장
이번 대선을 치르고 보니 대한민국 사회가 얼마나 양극단으로 분열돼 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전부 아니면 전무, 흑이 아니면 백, 거짓과 가짜뉴스가 판을 치며 국민을 두 동강 내고 말았다. 여기저기 들리는 말이, 이번 선거가 유달리 유권자의 목을 졸라 한쪽 선택을 강요했다며 영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예로부터 “싸움은 말리고 흥정은 붙이라”고 했는데 작금의 대한민국은 싸움은 붙이고 흥정은 실종되는 판국이 됐다.
만연된 사회갈등이 표출되기만 할 뿐 이를 봉합하려는 노력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다. 우리사회 전반에 ‘남 탓’과 갈등의 골이 깊기 때문이다. 갈등은 인간의 정신을 혼란하게 하고 내적 안정과 조화를 파괴한다. 또한 이해관계나 의견이 상충돼 서로의 행동을 제약하게 된다. 개인이나 사회, 국가가 어떤 사안을 추진하거나 문제해결을 위해 조율하고 타협하지 못함으로써 혼란과 소모전을 유발하게 된다.
지난해 6월 영국의 한 조사기관이 28개국 2만3000여 명을 대상으로 사회갈등에 대한 여론조사를 했다. 전체 12개 갈등항목 중 한국국민은 7개 항목에서 ‘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해 세계 1위의 ‘갈등사회국가’임을 보여줬다. 성별, 나이, 빈부간의 갈등과 격차가 두드러졌다. 빈부격차는 대한민국 국민의 91%가 심각하다고 응답해 남미의 칠레와 공동으로 1위의 오명을 얻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조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올해 초에 실시한 우리나라 성인남녀 대상의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85.8%가 ‘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여기에서도 주로 성별, 빈부, 이념, 세대 등 다양한 분야에서 갈등이 악화되고 있다고 답했다.
갈등이 악화되면 갈등당사자의 삶을 피폐하게 하고, 사회적 불안을 조성하며, 기회비용의 상실을 초래한다. 사회적 희생이 큰 것이다. 경제적 갈등비용도 증가해 그만큼 국가·사회적 손실을 가져다주게 된다. 국내연구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사회적 갈등비용은 연간 246조원 이상으로 추산되며 이는 1인당 GDP의 27%에 달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우리 국민이 바라는 바는 명확하다. 비록 이번 선거에서 양단으로 갈라졌지만 오히려 화합의 노력을 더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치권에 ‘협치’와 ‘통합정신’을 주문하고 있다. 이에 부응해 갈등을 완화하고 화합하기 위해서는 절충(折衷)의 정신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절충은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서로 대립하는 여러 욕구를 하나의 의사결정이나 행동을 통해 그나마 적정하게 만족시키려는 기제를 말한다.
극단의 대치에서는 중도적 절충이 필요하며 이는 양쪽의 양보를 필요로 한다. 문제 해결의 장애는 서로의 입장에서 한 치도 물러섬이 없는, 즉 양자만 있고 중간자가 부재한 상황이 되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과정에서도 국민을 아연실색하게 만든 일은 자신의 사익을 따져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가로질러 가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대의명분을 가지고 중심을 잡는 사람은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우리사회에 중간지대가 없고 중재기능이 부족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여기에서 ‘자발적인 중재(voluntary arbitration)’를 전통으로 하는 라다크(Ladakh)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자. 라다크는 리틀 티베트라 불리는 작은 왕국이었다. 인도에 속하며 주변이 파키스탄과 중국, 티베트, 인도의 4개국으로 둘러싸인 고원지대에 있다. 스웨덴의 언어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여사가 16년간 언어연구를 위해 라다크에 들어가 살면서 보고 느낀 것을 ‘오래된 미래’라는 책으로 발간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여사는 라다크의 가장 훌륭한 전통이 갈등해소법임을 발견했다. 갈등당사자의 주변 사람이 ‘자발적 중재자’가 돼 양측이 화해하도록 돕거나 문제해결을 위해 촉진자의 역할에 나서는 것이다. 특히 이들 사회는 갈등 당사자가 싸우더라도 제3자적 의견이 있으면 이를 받아들이는 수용적 태도가 돋보였다고 저자는 전한다. 이는 중재자가 독립성을 유지하며 어느 편을 들거나 자신의 이익이나 유·불리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처럼 중재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선진국 반열에 올랐음에도 중재적 리더의 존재감이 보이지 않는다. 양 극단의 편 가르기에서 눈치 보느라 설 땅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다. 지금이라도 절충의 리더십을 가지고 ‘자발적인 중재자’로 나서는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갈등의 당사자는 자발적 중재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갈등이 완화되는 사회를 만드는 데 협조해야 할 것이다. 대통령 당선자도 통합적 리더십을 가지고 이러한 자발적 중재의 토양을 만드는 데 앞장서줬으면 좋겠다. 중도적인 사람들을 많이 등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이의준 중소기업정책개발원 규제혁신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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