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1995년, 생애 처음 접한 한국 음악은 미지의 외계로 향하는 통로 같았다.
서울의 한 음반 가게를 뒤적이다 건져 올린 ‘신중현과 엽전들’ 데뷔 앨범(1974), 며칠 뒤 도쿄 자택에서 내려놓은 턴테이블 바늘, ‘미인’의 기타리프는 벼락처럼 고막에 떨어졌다.
“난데 고레! 조또 마떼, 조또 마떼!(이게 뭐야, 잠깐, 잠깐)!”
한국 록의 심원한 세계를 알고픈 갈망이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산울림, 키보이스, 시나위를 파기 시작했다. ‘미인’의 충격파. ‘한국 사이키델릭 록에는 일본에는 없는, 아시아적인 무언가가 있다’ 느꼈다. 1999년 무렵 양국에서 활동하는 밴드 ‘곱창전골’을 결성했고, 2006년 한국인 아내와 결혼해 서울에 집을 꾸렸다. 그로부터 28년 간, 그의 몸속엔 한·일 음악과 문화가 뒤섞여 출렁댔다.
지난 12일 서울 망원동에 위치한 한 단독 주택. 사토 유키에는 만화에서 방금 막 튀어나온 얼굴로 기자를 맞았다. 곱슬곱슬 빗자루 머리와 귀여운 둥글이 안경. 일본식 억양이 살짝 아른거리지만, 준수한 문법과 어휘의 한국어가 털털한 웃음에 섞여 또랑또랑 들려왔다. “신중현 선생님 음악이 없었으면 지금의 K팝도 없다고 생각해요.”
밴드 '곱창전골'을 이끌고 한국, 일본 활동을 오가는 사토 유키에. 한국인들에게 좋은 일본 음악들을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취지로 '일본 LP 명반 가이드북'을 펴냈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최근 유키에는 저서 ‘일본 LP 명반 가이드북’을 펴냈다. 1998년 문화 개방 이전 정치, 역사적 금기로 ‘불모지’에 가까웠던 일본 음악 흐름을 한눈에 조망하는 책이다. “한국인들이 접하지 못한 일본 대중음악을 역사적 관점에서 세세하게 짚어보면 어떨까 생각했어요. 60년대 스파이더스, 70년대 나가부치 츠요시, 8090년대 X재팬 식의 큰 흐름은 알지만 그 사이 공백은 대체로 잘 모르니까.”
대답이 허스키처럼 천진하고 다부졌다. 한국에 깊은 애정을 지닌 그의 시선이 흥미롭다. 비틀스와 벤처스를 필두로 태동한 서양 록 흐름을 일본 ‘GS(그룹사운즈)’ 문화와 연결 짓고, 다시 이를 새롭게 창조, 변용한 한국의 80년대 ‘그룹사운드’ 전성기와 비교하는 식이다.
“GS란 60년대 일본에 생긴 특이한 문화였습니다. 비틀스 스타일을 표방했으나 레코드 회사나 작곡가들이 그 개념을 제대로 몰라, 가요인지 록인지 모르는 일본 특유의 스타일들이 많이 나왔어요. 또 한국 그룹사운드는 일본 ‘GS’와 비슷한듯하면서 너무나 다른 스타일들이에요. 신중현(‘신중현과엽전들’), 김창완(‘산울림’) 선생님부터 시작해 한국 민요 록까지 파게 되면서 정말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최근 재조명되고 있는 시티팝 열풍과 관련해선 그 용어의 기원부터 살펴준다. 당시 1970~80년대 서구의 AOR(Adult Oriented Rock, 초기에는 편하게 듣기 좋은 록을 일컬었으나 점차 재즈, 소울 음악도 포용한 개념으로 사용됨)의 최신 조류를 받아들인 일본에서는 록과 포크, 가요의 경계가 모호하고 멜로디가 부각되는 연주 중심의 음악들을 ‘뉴뮤직’이라 불렀다.
유키에는 “시티팝이란 용어도 당시 기록으로 존재하기는 했지만 뉴뮤직 만큼 대중화되지는 않았다. 훗날 도회적이고 세련된 이미지로써 용어가 재조명되면서 뉴뮤직이 시티팝으로 대체돼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밴드 '곱창전골'을 이끌고 한국, 일본 활동을 오가는 사토 유키에. 한국인들에게 좋은 일본 음악들을 소개시켜주고 싶다는 취지로 '일본 LP 명반 가이드북'을 펴냈다.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책은 록과 포크, 시티팝, 가요로 장르를 쪼개 각 사조를 설명하고 총 200장의 LP 음반 해설을 싣고 있다.
한국에서 조경수가 히트시킨 곡 ‘YMCA’와 관련해선 미국 디스코 그룹 빌리지 피플의 원곡 ‘영 맨(Young Man·Y.M.C.A)’과 사이조 히데키의 일본어 번안곡과 비교해준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곡으로는 이시다 아유미의 ‘블루라이트 요코하마(Bluelight Yokohama)’를 꼽고 “군사정권이던 1970년대 말까지 한국에서 거의 유일하게 알려진 일본 가요곡”이라며 “제작비가 거의 들지 않았던 빽판(해적판)으로 돈을 쓸어 모은 가게들도 있었다”고 설명한다.
타케우치 마리야의 ‘버라이어티(Variety·1984·대표곡 ‘Plastic Love’ 수록)’, 안리의 ‘타임리!!(Timely!!·1983)’ 같이 최근 한국 MZ세대를 중심으로 인기인 음반들도 놓치지 않는다.
“역사적인 터닝 포인트가 된 음반들을 골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일본에서도 평단과 대중을 중심으로 ‘모르면 안 될 것 같다’ 하는 명반들이 있거든요. ‘블루라이트 요코하마’는 지금도 제가 한국 지방에서 공연하면 늘 신청을 받는 곡입니다. 안리의 ‘타임리!!’는 한국 젊은 친구들이 많이 찾아요. 그 시절에도 지금에도 ’제 때 나온(Timely)’ 음반인 셈이죠.”
대표곡 ‘스키야키’로 아시아 최초 빌보드 메인 싱글차트 ‘빌보드100’ 1위에 올랐던 사카모토 큐를 언급할 때는 방탄소년단(BTS) ‘다이너마이트(Dynamite)’와 연결시킨다.
“지금 일본 청소년들도 일본 아이돌보다 BTS를 더 좋아하거든요. 과거 한류 열풍의 주역 욘사마가 한국과 일본의 대사(大使)였다면, BTS는 이제 세계의 대사죠. BTS 빌보드 1위로 세계인들이 한국에 주목하는 현상이 생기지 않았나 싶어요.”
도가니탕, 개불, 옻닭은 물론 삭힌 홍어까지 즐겨먹는다. 2013년 일본에서 ‘한식 B급 음식 대전’이란 책을 출간했고, 2014년 밴드 곱창전골로 한식을 콘셉트로 한 4집 음반 ‘메뉴판’(수록곡 ‘홍어의 눈물’·‘노가리 트위스트’·‘돌나물로 시작되고 도루묵으로 끝난 사랑의 노래’)도 냈다. 그러나 한일 기상도는 어제도 오늘도 구름이 짙다.
“정치하고 문화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정치는 끊어져도 문화는 멈추지 못하죠. 70년대 극심한 시절에도 ‘블루라이트’가 알려졌듯, 지금도 BTS와 시티팝을 나누며 젊은 세대들이 교감하죠. 그런 젊은 친구들이 미래로 나간다면 상황을 긍정적으로 기대해 봐도 좋지 않을까요.”
마지막 대답은 존 레논의 뽀얀 연기 같았다.
“저는 낙천가에요. 히피 문화에 영향 받은 러브앤피스 세대죠. 하하하.”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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