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최병호 기자] 고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의 10주기를 맞아 민주당은 일제히 그의 정신을 기리며 추모했다. 이재명 후보도 29일 김 전 의장 추모식에 참석해 '김근태 정신'의 계승과 실현을 다짐했다. 고 김대중, 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과 함께 민주당 정신의 뿌리인 그의 10주기를 맞아 '민주주의 대 검찰독재'의 전선이 형성된 20대 대선의 승리에 대한 열망과 다짐도 강화됐다.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부활이다.
김 전 의장은 한국 민주화운동의 상징, 민주화의 산증인 등으로 불린다. 이는 김 전 의장이 밟아온 생애가 한국 민주주의 역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1965년 서울대 경제학과에 입학한 김 전 의장은 한일회담 반대운동과 삼성그룹 사카린 밀수 규탄시위 등에 참여하면서 학생운동에 깊이 관여하게 됐다. 당시 김 전 의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동창인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고 조영래 변호사 등과 함께 3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71년 서울대 내란음모사건, 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되기도 했다.
서울대 경제학과 재학 시절 김근태 전 열린민주당 의장 모습(사진 중간). 사진/한반도재단·뉴시스
본격적인 재야 인사로서의 전환점을 맞은 건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후 전두환씨가 12·12 군사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하면서다. 김 전 의장은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을 결성했다. 군부세력은 민청련을 즉각 이적단체로 규정했다. 1985년 9월, 김 전 의장은 민청련 시위로 경찰서 유치장에 갇힌다. 곧 풀려날 것으로 여겼으나 어느새 북한의 지령을 받은 고정간첩이 되었다. 김 전 의장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고, 23일 동안 이근안 경감 등에게 모진 고문을 당한다.
잠 안 재우기, 전기고문, 물고문 등 인간의 정신과 한계를 시험하는 고문들이 이어졌다. 그해 12월 김 전 의장이 법정에서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는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하루에 5시간씩 당했다. 이근안 경감 등은 고문을 하면서 김 전 의장의 비명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게 하려고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경찰들은 고문 중 "최후의 만찬이다", "너 장례 날이다" 등의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구타와 굶기기, 바닥에 알몸으로 포복하기 등도 가해졌다. 김 전 의장은 결국 항복한다. 북한 지령을 받고 간첩행위를 했다고 허위 자백을 한 것. 김 전 의장은 법원에서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고, 쓰라는 조서내용을 보고 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김 전 의장은 이때 당한 고문의 충격과 후유증으로 말과 행동이 어눌해지는 파킨슨병을 앓게 됐다. 코에서는 쉴 새 없이 콧물이 흘러 손수건을 늘 휴대해야 했다.
1992년 김근태 전 열린민주당 의장이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으로 구속된 홍성교도소에서 출소하고 있는 모습. 사진/한반도재단·뉴시스
김 전 의장은 1988년 복역을 마치고 출소한 뒤에도 민주화을 위한 투쟁과 여정을 멈추지 않았다. 1989년엔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에서 정책실장과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과정에서 다시 2년간 구속되는 고초를 겪었다. 김 전 의장은 군부세력이 자행한 고문과 가혹행위를 폭로하는 일에도 적극 나섰다. 부인 인재근씨(현 민주당 의원)와 남영동 고문사실을 해외 언론과 인권단체 등에 알렸다. 두 사람은 이 공로로 1987년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했다. 독일의 함부르크자유재단은 그를 '세계의 양심수'로 선정했다.
김 전 의장은 1990년 중반 무렵부터 제도권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1995년 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주도한 새정치국민회의 창당에 합류, 부총재를 지냈다. 이후 1996년 15대 국회에서 서울 도봉갑에 당선된 후 내리 3선을 역임했다. 16·17대 국회를 통해 86세대가 대거 정치권에 입문하면서 김 전 의장을 따르던 동지와 후배들은 자연스레 그를 중심으로 모였다. 정치권에선 김 전 의장을 중심으로 한 계파를 '김근태' 이름의 이니셜을 따 'GT계'라고 불렀다. 나중엔 '경제민주화와 평화통일을 위한 국민연대'(민평련)로 칭했다. 기동민·노영민·우원식·유은혜·이인영·임종석 등이 대표적인 GT계 인사로 꼽힌다.
2009년 10월15일 김근태 민주당 선대위원장이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이동의 한 음식점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김 전 의장은 참여정부에서 열린우리당의 원내대표와 의장(현 당대표), 보건복지부 장관까지 지냈다. 통일부장관을 내심 원했으나 정동영 전 의장에게 밀렸다. 김 전 의장은 참여정부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과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노동유연화, 재벌규제 완화 등으로 신자유주의 노선을 걸을 때는 강력하게 노무현 당시 대통령에게 제동을 걸기까지 했다. 노 전 대통령이 대선공약인 주택 분양원가 공개 방침을 번복하자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요구한 것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일화다.
민주화의 대부라는 상징성을 가진 김 전 의장은 항상 차세대 지도자감으로 거론됐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 거동이 불편한 데다 재야 정치인의 이미지가 강했던 탓에 대중적 정치인의 이미지를 확보하고 대선주자로까지 발돋움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김 전 의장은 2008년 18대 총선에서 낙선한 이후엔 사회활동에 주력하다가 2012년 12월30일 향년 6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생애 마지막까지 그는 고문에 따른 파킨슨병에 시달렸다. 그가 유언처럼 남긴 말은 "2012년을 점령하라"였다.
김 전 의장 10주기를 맞아 정치권에서 다시 김근태 이름 석자를 떠올리는 건 '10주기'라는 상징성도 있지만, 내년 대선이 이재명 대 윤석열, '민주주의 대 검찰독재'의 전선으로 규정되면서다.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목소리 속에서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한 김 전 의장이 다시 부각되고 있는 것. 조승래 민주당 선대위 수석대변인은 "내년은 우리에게 중요한 분기점이며, 복수혈전의 과거로 또 다시 회귀할지 대전환의 시기에 희망과 기회의 미래로 나아갈지 결정하게 된다"면서 "몸과 마음 곳곳에 새겨진 끔찍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미래로 통합으로 나아가고자 부단히 애쓴 '김근태정신'을 잊지 않고 계승하겠다"고 다짐했다.
2012년 12월30일 오전 김근태 전 열린민주당 의장이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향년 64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사진/뉴시스
김 전 의장을 지근거리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한 인사는 "김 전 의장이 영면한 후 동지들은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에게 배운 '독재와 구태'에 대한 비판적 자세는 잃지 않았다"면서 "검찰독재로 회귀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내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주의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한 김근태 정신이 더욱 주목 받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상명 김근태민주주의연구소 소장(우석대 교수)는 "김 전 의장은 민주주의 절차에 따라 민주주의 사고로 살아온 분"이라며 "평생 주창한 민주대연합 정신과 경제인간화는 이번 대선에도 큰 메시지를 준다"고 말했다. 최 소장은 "윤석열 후보는 민주주의 소양을 갖추지 않았고, (대통령이 되면)검찰권위주의가 될 가능성이 크다"며 "'2012년을 점령하라'고 하셨던 김 전 의장이 지금까지 생존해 계셨다면 '국민을 위해 2022년을 혁신하라, 국민의힘으로부터 2022년을 사수하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라고 전했다.
고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 약력(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1947년 2월14일 경기도 부천 출생
- 1959년 2월 경기도 양평 양수초등학교 졸업
- 1962년 2월 서울 광신중학교 졸업
- 1965년 2월 경기고등학교 졸업
- 1965년 2월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입학
- 1972년 2월 서울대 졸업
- 1971년 2월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 수배
- 1974년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
- 1983년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초대, 2대의장
- 1985년~1988년 민청련사건으로 구속
- 1989년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전민련) 정책기획실장, 집행위원장
- 1990년~1992년 전민련 활동으로 구속
- 1992년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수립을 위한 국민회의 집행위원장
- 1993년 민주항쟁기념국민위원회 공동집행위원장
- 1994년 통일시대민주주의 국민회의 공동대표
- 1995년 민주당 입당, 민주당 부총재
-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부총재
- 1995년 새정치국민회의 도봉(갑) 지구당 위원장
- 1995년 사면복권
-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당선
- 1996년 한-이란 의원 친선협회 부회장
-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선거 수도권대책위원회 공동위원장
- 1998년 새정치국민회의 전자정부구현 정책기획단 위원장
- 1999년 아-태 민주지도자회의 이사
- 1999년 국민정치연구회 지도위원
- 1999년 새정치국민회의 당 쇄신위원회 위원장
- 1999년 한양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 1999년 국제금융박람회 추진위원회 위원장
-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 도봉(갑) 지구당 위원장
- 2000년 1월 새천년민주당 지도위원
- 2000년 3월 새천년민주당 16대 총선 서울 선거대책위원회위원장
- 2000년 4월 제16대 국회의원 당선
- 2000년 5월 우석대 겸임교수
- 2000년 8월 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 당선
- 2000년 9월 연변대학교 석좌교수
- 2000년 10월 새천년민주당 공적자금 관리 및 금융구조개혁특위위원장
- 2001년 한반도평화와 경제발전전략연구재단 이사장 (현)
- 2001년 새천년민주당 전자거래활성화를 위한 법령정비정책기획단 위원장
- 2001년 새천년민주당 소득격차완화특별위원회 위원장
- 2001년 11월 새천년민주당 상임고문
- 2002년 6월 8.8 재보선 특별대책기구 위원장
- 2002년 10월 새천년민주당 중앙선대위 상임위원
- 2002년 11월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위원
- 2003년 6월13일 새천년민주당 경제활성화대책특위 위원장
- 2003년 9월19일 국민참여 통합신당 원내대표
- 2003년 10월27일 열린 우리당 원내대표
- 2004년 4월15일 2004년 4월 15일 제17대 국회의원 당선
- 2004년 7월1일 제43대 보건복지부 장관 취임
- 2006년 2월18일 열린우리당 최고위원 당선
- 2006년 6월10일 열린우리당 의장취임
- 2007년 6월12일 대선불출마 선언
- 2007년 8월 대통합민주신당 창당발기인 및 중앙위원
- 2008년 2월 통합민주당 상임고문
- 2011년 12월30일 별세
최병호 기자 choibh@etomato.com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최병호 공동체부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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