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끊임없이 우리를 편리하게 한다. 누구에게나 편한 건 아니다. 나이를 먹을 수록 새로운 기술은 아무리 편할지라도 적응의 대상이자 생활의 장벽일 뿐이다. 맥도날드의 키오스크, 스타벅스의 사이렌오더, 혹은 인터넷 모바일 뱅킹등이 그렇다. 활용의 문제일 뿐, 이해는 나이와 상관없이 어렵다. 아니, 불가능 해진다. 스마트폰이 어떤 기술적 원리에 의해 터치스크린이 되고, 유튜브가 어떤 알고리즘으로 인해 추천 영상을 제공하는지 알고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애플과 구글 직원일지라도 관련 부서가 아닌 이상 알기 어렵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이것이 상용화되는 게 문명의 역사라면, ‘활용’은 세대를 구분하는 잣대가 된다. 스마트폰이 등장했을 때 환호했던 세대가 NFT, 메타버스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듯 말이다.
음악에 있어서 이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사건이 떠오른다. 2006년 발매된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다. 20세기 중반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였던 글렌 굴드는 1955년 같은 앨범을 발표했다. 그의 인생은 어찌 보면 이 작품으로 시작해서 이 작품으로 끝났다해도 과언은 아니다. 1964년, 콘서트 활동을 중지하고 오직 레코딩에만 몰두하던 그는 1981년 다시 한번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녹음했다. 다음해인 1982년, 글렌 굴드는 세상을 떠났다. 클래식의 명반으로만 남아있던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2006년 화제에 오른 이유는 죽은 자가 연주를 했기 때문이다.
리마스터링이냐고? 설마. 옛날 음원이 발달된 음향 기술로 새롭게 포장되는 경우는 많았다. 비틀즈로 대표되는 1960년대부터 오아시스를 비롯한 1990년대 명반들이 새로운 기술의 힘으로 새로운 소리가 되어 돌아왔다. 그러나 이런 작업은 모두 ‘음원’을 토대로 이루어진다. 즉 아티스트가 남긴 결과물에 음향 기술로 계속 새 옷을 입히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원본이 존재한다. 아무리 때때옷을 입히고 꽃단장을 해도 몸통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몸통의 존재 자체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이유는 이렇다. 이 앨범은 글렌 굴드가 직접 연주한게 아니다. 프로그램에 의해 조작되는 피아노의 소리를 녹음한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사실 원리는 간단하다. 프로그램이 글렌 굴드의 1955년 레코딩을 분석한다. 그래서 당시의 레코딩 기술로 녹음된 ‘음원’을 배제하고 스튜디오에서 울리는 그의 연주만을 남긴다. 이를 데이터로 만들면 이 데이터에 의해 작동되는 피아노가 오리지널 연주를 ‘재현’한다. 어떤 건반을 얼마나 길게 눌렀는지는 물론이고, 건반을 누르고 페달을 밟는 물리적 과정까지 모두 고스란히 이 피아노는 연주한다. 따라서 1955년 뉴욕 CBS스튜디오에서 울리던 글렌 굴드의 피아노가 2006년 토론토의 CBC 스튜디오에서 ‘원음’ 그대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 연주를 녹음한 게 이 앨범이다.
이 앨범은 듣는 사람에게 혼돈을 준다. 비록 원음을 바탕으로 재탄생한 앨범이라지만 정작 CD안에 담겨있는 건 가공된 원음이 아니다. 기계에 의해 새롭게 연주된 음악이다. 글렌 굴드의 연주는 이 음악에 있어서 일종의 설계도 역할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앨범을 글렌 굴드의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피아노 앞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다. 건반과 페달이 혼자 위아래로 움직이며 소리를 낼 뿐이다. 그러나 그 소리는 정확히 1955년 글렌 굴드가 연주했던 바로 그 소리다. 따라서 이 음악은 글렌 굴드의 연주이자, 연주가 아닌 셈이다.
혼란은 가중된다. 통상, 예술이라는 것은 사람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다. 미디어 아트가 발달한 지금도 결국 붓이 프로그램으로 바뀌었을 뿐, 사람의 손이 만든다. 우연성의 예술이든 해프닝이든 뭐든, 어쨌든 인간의 땀이나 하다못해 잔꾀가 들어간단 얘기다. 하지만 이 <골드베르크 연주곡>에는 사람이 없다. 데이터와 프로그램, 그리고 기계 장치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로 그 소리를 생생한 음질로 듣고 있다. 1955년 레코딩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풍성한 울림과 공간감, 세밀한 음감의 변화까지 고스란히 느끼는 것이다. 즉, 예술작품이 주는 감동을 이 앨범은 재현한다. 그렇다면 이 앨범은 예술이기도 하고, 예술이 아니기도 하다.
이 앨범은 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해체한 대표 사례로 꼽힌다. 이미 가상 악기가 실제 악기를 거의 완전히 대체한 지금, 앞으로 기술로 인한 인식의 혼란은 폭증할 것이다. 새로운 기술이 새로운 철학적 질문을 던질 때 마다, 인식 전환을 요구할 때 마다, 늙어감에 대한 한탄도 늘어날 것이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일일공일팔 컨텐츠본부장(noisep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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