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대중음악신의 ‘찬란한 광휘’를 위해 한결같이 앨범을 만들고, 공연을 하고, 구슬땀을 흘리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TV, 차트를 가득 메우는 음악 포화에 그들은 묻혀지고, 사라진다. ‘죽어버린 밴드의 시대’라는 한 록 밴드 보컬의 넋두리처럼, 오늘날 한국 음악계는 실험성과 다양성이 소멸해 버린 지 오래다. ‘권익도의 밴드유랑’ 코너에서는 이런 슬픈 상황에서도 ‘밝게 빛나는’ 뮤지션들을 유랑자의 마음으로 산책하듯 살펴본다. (편집자 주)
조명조차 없는 어두컴컴한 옥탑. 때마침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부슬부슬. 몽환의 안개를 흩뿌리는 이들의 음악 같이.
따뜻한 커피 잔을 나누며 대화가 김처럼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고정적인 작업실이 아직은 없어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이랄까요. 신촌 호텔방도 빌려봤어요. 해외로 보낼 CD 포장을 손수 같이 하려고요.”
최근 신촌의 한 건물 지상공간에서 만난 밴드 ‘포그(Fog)’ 멤버들, 신경원(보컬, 기타), 류강현(기타), 이환호(드럼), 오승준(베이스)이 말했다.
서울 신촌의 한 건물 옥탑에서 만난 4인조 슈게이즈 밴드 포그. 왼쪽부터 이환호 오승준 류강현 신경원. 사진/뉴스토마토 권익도 기자
2018년 결성된 이들은 ‘슈게이즈(shoegaze)’ 음악을 표방한다. 슈게이즈는 기타 이펙트로 생성하는 잡음과 안개 같은 보컬의 음성이 뒤범벅되는 특징을 지닌 록의 하위 장르다.
주로 라이브 무대에서 ‘바닥 혹은 신발만 쳐다보며(gazing at their shoes)’ 거칠게 연주한다는 데서 표현이 유래됐다. 광의로는 무기력한 무대 매너로 일관한 1980, 90년대 서구 밴드의 태도, 문화까지도 포괄한다.
지난해 11월 포그는 음악 플랫폼 밴드캠프에 데뷔 앨범 ‘포게스크(Fogesque)’를 발표했다. 이후 한 달 뒤 국내외 주요 음원 플랫폼에 음원을 공개하고 100장 한정 CD를 1차로 찍었다.
별다른 홍보도 없었는데 전 세계에 암약하는 수많은 슈게이즈 마니아들은 원석 캐듯 이들을 발굴해냈다. 미국과 호주, 브라질 슈게이즈 전문 라디오 방송에서 이들 앨범은 지난해 최고의 슈게이즈 앨범으로 선정됐다.
최근에는 일본, 독일,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에서도 주문이 들어와 이들조차 어리둥절할 정도다. 이들은 “예상 외로 평가가 좋아서 저희도 깜짝 놀랄 정도”라며 “해외에서 최근 한국 슈게이즈 음악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피부로 체감한다”고 했다.
밴드 포그 데뷔 앨범 ‘포게스크(Fogesque)’. 앨범 커버는 밴드의 드러머이자 프로듀서 이환호가 2~3살 때 그린 그림을 차용했다. 앨범 커버 뒤에 이들은 ‘전 세계 슈게이즈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앨범을 바친다’고 적었다. 사진/포그
이들은 모두 슬로우다이브나 라이드, 콕토트윈스, 마이블러디발렌타인 같은 팀들의 최전성기를 경험하지 않은 MZ세대다. 유튜브의 심해를 헤엄치다 별안간 넓고 깊은 세기말 슈게이즈 매력에 풍덩 빠져버렸다.
“저희는 배움에 장벽이 없는 ‘운이 좋은 세대’죠. 유튜브에 들어가면 되니까요. 펑크 록과 노이즈 록을 듣다 어느날 슬로우다이브에 꽂혀 슈게이즈를 파기 시작했어요.”(신경원)
전곡 작사, 작곡하는 신경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층위의 멤버들이 합세했다. 프로듀서를 맡은 이환호는 밴드 합류 전 블랙 메탈 계열의 음악을 즐겼다. 실용음악과를 나온 오승준과 류강현은 본류가 재즈다.
지글대는 기타 노이즈와 잔향으로 범벅된 포그의 음악은 현실과 비현실의 꿈 같은 경계로 청자를 잡아끈다. 촉촉한 풍광을 그려내는 기타의 공간계(리버브) 사운드, 웅얼거리는 영어 가사, 루저 감성 비슷한 노랫말...
“개인으로 넘을 수 없는 사회의 벽이 있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힘들다, 울고 싶다, 그런 감정을 반작용 삼아 풀어낸 음악이랄까요. 고립 같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어요.”(신경원)
밴드 포그. 왼쪽부터 이환호 오승준 류강현 신경원. 사진/포그
첫 데뷔 앨범의 수록곡 ‘Nocturne’은 사회적 폐쇄 공포증에 대한 노래다. ‘내면의 아우성만 들린다’는 가사를 실어 나르는 화사한 멜로디는 기타의 노이즈가 터지는 후주 부로 이어지며 화자의 감정을 최대 진폭으로 발화한다. 멤버들은 “앨범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아닐까 한다”며 수줍어했다.
이 후주처럼 신비로운 배음(倍音)은 이들 앨범의 가장 큰 특징이다. 기타의 공간계 음을 자주 활용해 사운드를 만든다. “쉬머(Shimmer) 리버브를 쓰면 요정이 마법의 가루를 뿌리는 듯한 음향이 만들어져요. 앨범 전반에 깔린 예쁜 안개 같은 공간감을 만들어냅니다.”(류강현)
이들은 최근 자신들과 밴드캠프를 통해 해외에서 주목받는 또 다른 슈게이징 국내 음악가 ‘파란노을’을 흥미롭게 들었다고 했다. 파란노을 2집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은 올해 초 미국 유명 사이트 ‘레이트 유어 뮤직’에서 선풍적이었다. 미국 음악 전문 매체 피치포크에서도 평점 10점 만점에 8점을 받았다.
“정통 슈게이징에서 벗어나, 최근에는 유하게 흘러가는 ‘뉴게이즈’ 사운드란 말도 있거든요. 한국형 뉴게이즈를 정말 잘 만들었다 생각이 들더군요. 리얼 악기를 쓰든, 가상 악기를 쓰든 사실 곡을 잘 만들면 되는 시대잖아요. 슈게이징 열풍이 더 불면 좋겠어요. 공간계 음을 쓰는 포스트록이든 매스록이든 다른 장르도 마찬가지고요.”(이환호)
어쨌거나 변방의 음악으로 치부되던 한국 슈게이즈가 새 지평을 열고 있다는 사실은 반가운 일이다. 우울한 정서, 루저 감성이 코로나로 물든 지금의 시대성을 자극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작 팬데믹 때 데뷔 앨범을 낸 이들은 “라이브가 근간인 슈게이즈 음악을 직접 선보일 기회가 없어 안타깝다”고 입을 모았다.
“슈게이즈의 핵심은 라이브라 생각해요. 아날로그 이펙터들을 펼쳐놓고 음반과 다른 사운드 실험을 펼쳐보는 재미도 있고요. 소규모도 좋고 큰 공연장에서도 라이브를 해보고 싶습니다. 방금 전까지는 올해 안에 나올 2집 음반 기타 녹음도 하고 왔어요.”(신경원, 류강현)
밴드 포그. 사진/포그
“평소 내성적”이라는 이들은 음악 외적으로 만나도 외향적인 활동은 그리 많이 하지 않는다고 했다. 주로 카페에서 만나거나 햄버거를 먹으며 일상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다.
마지막으로 한 눈에 들어오는 황홀한 신촌 야경을 등지고, 데뷔 앨범을 특정 공간으로 표현해달라고 했다.
“목욕탕이요. 따뜻한 물이 몸에 닿듯이 들어주셨음 좋겠어요. 온천탕 최고.”(류강현)
“제 방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그려가는 소설 같은 느낌도.”(신경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꿈결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거든요. 눈에 보이지만 직접 느낄 수 없는 실체, 두 발로 직접 밟기는 어려운 공간... 오늘날 같은 상황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이환호, 오승준)
권익도 기자 ikdokwon@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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