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토마토 이성휘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4일(현지시간) 태국 방콕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예정에 없었던 깜짝 '단독환담'을 가진 건 좋은 징조다. 강제징용에 대한 한국 대법원 판결과 그에 따른 일본의 수출규제 보복으로 경색된 한일관계에 대한 양국 정상의 개선 노력을 확인하는 자리여서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가 열린 노보텔 방콕 임팩트의 정상 대기장에서 아베 총리와 오전 8시35분부터 46분까지 11분간 이야기를 나눴다. 양국 외교당국의 사전 조율 없이 문 대통령이 즉흥적으로 환담을 요청한 것이지만, 아베 총리도 적극 응했다는 후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오전(현지시간) 태국 방콕 임팩트포럼에서 열린 제22차 아세안+3 정상회의에 앞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사전환담을 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청와대에 따르면 문 대통령은 이날 아세안+3 정상회의에 앞서 정상들의 대기 장소에서 인도네시아·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미얀마 등 다른 나라 정상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던 중 아베 총리가 입장했고 문 대통령이 잠시 앉아서 얘기를 나누자고 권했다.
문 대통령의 즉흥적인 요청에 아베 총리가 응하는 형태를 취하긴 했지만, 그 바탕에는 양국 관계 악화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양 정상의 공감대가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특히 이달 23일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앞둔 가운데, 이번 회의가 양 정상이 직접 만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의 별도 회동은 지난해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 계기의 정상회담 이후 13개월여 만이다. 지난 6월 일본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와 전날 갈라 만찬에서는 가볍게 악수를 나눴을 뿐 따로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양 정상의 환담이 매우 우호적이며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면서 "정상은 한일 관계가 중요하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며 한일 양국 관계의 현안은 대화를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최근 두 나라 외교부의 공식 채널로 진행되고 있는 협의를 통해 실질적인 관계 진전 방안이 도출되기를 희망했다"고 덧붙였다. 특히 문 대통령은 "이외에도 필요하다면 보다 고위급 협의를 갖는 방안도 검토해 보자"고 제안했고, 이에 아베 총리는 "모든 가능한 방법을 통해 해결 방안을 모색하도록 노력하자"고 화답했다.
고 대변인은 기자들과 만나 문 대통령이 언급한 '보다 고위급 협의'에 대해 "장관급이 될 수도 있고 더 그 윗 단계(정상회담)의 협의가 될 수도 있겠지만 어느 것 하나 확정적으로 지금으로서는 말씀을 드리기는 어렵다"고 말을 아꼈다. 또 지소미아나 강제징용 판결 등 구체적인 현안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는지에 대해서도 "그 외에 어떤 얘기가 있었는지는 내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양 정상 간의 만남이 정말 오랜만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 대화를 통해서 한일관계를 풀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면서 "대화를 통해 한일관계가 좀 더 우호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관계로 발전될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강조했다.
다만 일본 측의 발표는 청와대와 미묘한 온도차를 보였다. 일본 외무성은 보도자료에서 "아베 총리가 문 대통령에게 양국 간 문제에 관한 우리의 원칙적 입장을 확실히 전달했다"고 밝혔다. 이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관련 판결은 국제법에 위반되며, 한국 정부가 먼저 한일 청구권협정을 준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반복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에 고 대변인은 "더 이상 확인해 드릴 것은 없다"면서 "대화를 통한 해결이라는 방안은 양 정상 간에 공감대가 있었다. 그래서 대화를 통한 원칙을 재확인했다"고만 재차 언급했다.
또한 문희상 국회의장이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징용피해자들이 납득할 만한 안을 만들었다'고 밝힌 것에 대해선 "우리 정부는 한일 기업의 '1+1'안 이외에 공식적으로 더 제안한 것은 없다"면서 "다양한 경로로 의견을 제안할 수 있지만 어느 단위까지 합의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외에도 일본 언론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환담 자리에서 문 대통령의 모친상에 조의를 표했고, 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달 나루히토 일왕 즉위식에 참석한 것에 대해서도 감사의 뜻을 밝혔다. 문 대통령도 조의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일왕 즉위에 축하의 뜻을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 태국 방콕의 임팩트 포럼에서 열린 제22차 아세안+3 정상회의에 참석해 각국 정상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한편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제3차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정상회의에 참석했다. RCEP은 ASEAN 10개국과 한국, 중국, 일본, 호주, 뉴질랜드, 인도 6개국 등 총 16개국이 참여하는 아태지역 메가 FTA로서,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세계 총생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세계 최대 FTA다.
정상회의에서 각국 정상들은 공동성명을 통해 인도를 제외한 15개국간 협정문 타결을 선언하고, 시장개방협상 등 잔여 협상을 마무리해 2020년 최종 타결 및 서명을 추진하기로 했다. 대규모 대중국 무역적자에 시달리는 인도는 막판까지 관세인하 문제에 신중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주요 이슈에 대해 참여국들과 공동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추후 입장을 결정할 방침이다.
아울러 정상들은 현대적이고, 포괄적이며, 수준 높은 상호호혜적 협정을 통해 △규범에 기반한 포괄적이고 개방적인 무역시스템 조성 △공평한 경제발전과 경제통합 심화에 대한 기여 필요성 등 RCEP의 지향점을 재확인했다.
문 대통령은 정상회의 발언에서 "RCEP 협정문 타결을 통해, 세계 최대 규모의 자유무역이 시작됐다"면서 "서로의 경제발전 수준, 문화와 시스템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하나의 경제협력지대를 만들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어 "RCEP을 통해 무역장벽을 낮추고, 각 국의 규범을 조화시켜 세계 경기하강을 함께 극복해 자유무역의 가치를 확산하자"면서 "RCEP이 교역을 넘어 경제, 사회, 문화 전반의 협력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부 관계자는 "RCEP을 통해 역내 주요국들과 교역·투자를 활성화하고, 수출시장을 다변화해 우리 국민과 기업에게 새로운 기회를 창출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특히 RCEP이 신남방국가들을 모두 포괄하고 있는 만큼 신남방국가들과 교역·투자를 확대하고, 인적·물적 교류와 협력을 활성화하는 등 향후 신남방정책을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도 될 것"으로 기대했다. 이 관계자는 "향후 우리 정부는 시장개방협상 등 잔여 RCEP 협상에서도 우리 국익을 극대화하면서 최종 타결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4일(현지시간) 태국 방콕의 임팩트 포럼에서 열린 제22차 아세안+3 정상회의에 참석해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방콕=이성휘 기자 noirciel@etomat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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