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지난 8월27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지역밀착형 생활 SOC 확충방안'을 발표했다. 기존 사회간접자본(SOC) 개념을 삶의 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로 확대해 일자리문제와 지역 격차를 해결하겠다는 내용이다. 내년도 투입 투자 규모는 8조7000억원으로 올해와 비교해 약 50% 늘어났다. 기존 SOC와 차이점을 강조한 것이 눈에 띈다. 대규모 사업을 통한 개발에서 탈피해 사람 중심의 인프라 구축에 힘쓰겠다는 대목이 핵심이다. 일자리 창출과 지역 경제 활성화도 주요 목표로 삼았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다소 생소한 개념인 생활 SOC를 실현한 곳으로는 문재인 대통령이 9월4일 국가건축정책위원회와 함께 방문한 서울 은평구 구산동 도서관마을이 거론된다. 생활 SOC와 관련한 문 대통령의 첫 현장 행보였다. 이날 정부는 구산동 도서관마을 등을 모범으로 삼고, 주민과 밀접한 인프라를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과연 개발 중심 SOC에서 생활 SOC로의 전환이 일자리 문제와 지역 격차를 해결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생활 SOC에 대한 예산 감시와 지역 조사가 잘 이루어진다면 주민들이 실감할 수 있는 변화를 골목골목에 일으킬 수 있다고 조언한다.
개발에서 사람 중심으로 전환
사회간접자본(SOC)은 생산·소비활동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해 주는 사회적 기반이다. 통상적으로 한국에서는 SOC가 도로나 철도와 같은 대규모 산업시설로 인식된다. 하지만 정확히는 자연이나 교육 등의 사회제도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모든 국민이 무상 또는 약간의 대가로 이용할 수 있는 공공의 성격을 갖는다. 사회적 효과가 크다는 점에서 정부가 사업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지만, 민간 투자도 서서히 유입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사회간접자본시설에 대한 민간투자법'이 제정된 1994년 이후 민간에 의한 투자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SOC는 원활한 경제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이라는 점에서 국가 경제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알려진 대로 4대강 사업도 대규모 SOC 사업이었다. 이명박 정부는 2009년 4대강 주변을 다기능 복합공간으로 만든다는 계획 아래 SOC 예산을 대폭 늘렸다. 당시 야당이었던 민주당은 과도한 예산 낭비, 자연 훼손과 부실 공사 등을 이유로 4대강 사업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양적 투자를 통한 고속성장의 부작용을 우려한 것이었다. 최근 시행된 4대강 사업에 대한 4차 감사에서 감사원은 4대강 사업의 문제점을 대거 짚어냈다. 사업 설계 단계부터 정당성이 부족했으며, 경제성이 낮다는 지적이다. 4대강 사업의 실패는 대규모 토목 SOC에 의존한 경기 부양 정책을 경계할 필요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잇따른 고용 지표 악화에 문재인 정부도 SOC 카드를 들었으나, 과거 정부 SOC와의 차별성을 강조했다. '생활'이라는 개념을 덧붙인 것. 8월27일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정부는 생활 SOC 사업의 구체적인 정의와 실행 방안을 발표했다. '지역밀착형 생활 SOC 확충방안'에 따르면 생활 SOC는 도로와 철도 등을 짓는 전통적인 SOC와 다른 개념으로 지역의 문화·체육 시설 등 편의 시설 등을 확충하는 일종의 복지 사업이다. 국민들의 삶의 질을 높여주는 SOC를 실행하겠다는 것이다.
내년 생활 SOC 사업에 배정된 예산은 올해(5조8000억원)보다 50%가량 증가한 8조7000억원이다. 기존 SOC 사업에는 올해보다 2.3% 줄어든 18조6000억원의 예산이 배정됐다. 올해(-14.2%)에 이어 연속해서 감속한 것이다. 정부가 생활 SOC 예산은 늘리고, 기존 SOC 예산을 줄인 것은 SOC 자체에 대한 인식 전환을 이루려는 의지로 보인다. SOC를 대형 토목 위주에서 국민들의 삶에 와닿는 '생활 밀착'으로 옮긴다는 의미다.
정부는 생활 SOC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고 지역경제를 활성화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생활 인프라를 확충하면서 자연스럽게 일자리가 창출되고, 신산업에 투자하면서 지속가능한 고용 창출의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계획이다. 또한 지역 특성을 고려한 맞춤형 투자를 진행해 경제 활력을 높이고 지역 격차를 해소하겠다는 방안이다. 문재인 정부가 강조하는 동반 성장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권대중 명지대학교 부동산학과 교수는 "생활 밀착형 SOC는 삶의 질을 높이는 동시에 지역 경제에도 활력을 줄 것"이라고 전망했다.
사회적 가치 고려…질적 투자 집중
기존 SOC와 생활 SOC의 구체적인 차별성은 '지역밀착형 생활 SOC 확충방안'에서 발표한 3대 분야 10대 투자과제에서 찾을 수 있다.
생활 SOC의 3대 분야는 ▲여가·건강활동 ▲지역·일자리 활력 제고 ▲생활안전·환경이다. 시민이 직접 이용할 수 있는 소규모 생활 인프라를 확충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환경이나 안전 등 사회적 가치를 고려한 질적 투자에 집중했다. 경제 성장을 일차적 목표로 한 대규모 SOC와 대비된다.
먼저 여가·건강활동 분야는 문화·체육시설 등 편의시설 확충과 지역 관광 인프라 확충 투자 과제로 이뤄진다. 관심이 쏠렸던 공공도서관 확대가 바로 이 분야에 속한다. 주요국 대비 도서관 공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을 고려해 작은 도서관을 모든 시·군·구에 1개씩 설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국민 생활과 밀접해 있는 체육센터나 전통시장, 문화 시설에 대한 투자도 포함된다.
지역·일자리 활력 제고 분야는 지역 특성을 살려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3대 분야 중 가장 많은 예산을 편성해 지역 균형에 무게를 싣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구체적인 과제는 도시재생, 농어촌 생활여건 개선, 스마트 영농 확산과 노후산단 재생 및 스마트 공장 등이다. 그중 취약지역 도시재생과 농어촌 생활여건 개선에는 각각 1조5000억원과 1조3000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특히 안전에는 다른 과제보다 큰 비중을 두었다. '생활안전 인프라 확충' 투자과제에 10대 투자 분야 중 가장 많은 예산(2조3000억원)이 투입될 예정이다. 민간 건축물·다세대 주택 대상 화재 예방을 위한 성능보강 신규 지원 및 노후 공공임대 시설개선을 지원하겠다는 계획이다. 또한 전통시장 및 교통 안전관리를 강화하는 방안을 담고 있다.
환경 분야는 미세먼지 대응 강화와 신재생에너지 시설 확충 과제를 포함한다. 미세먼지 차단숲을 조성하고, 수소 충전 인프라를 마련하는 계획을 담고 있다. 또한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을 위해 공공기관 유휴부지에 태양광 설비를 설치하고, 주택과 농가 등에 태양광 지원을 확대한다는 계획이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향후 추진계획에 대해 "2019년부터 주무부처를 중심으로 생활 SOC 분야별 중장기 사업 계획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히며 "2020년 이후에도 신규 수요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겠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9월4일 서울 은평구 구산동 도서관마을에서 열린 대한민국 국민생활 SOC 현장방문 행사에서 인사말 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예산 감시·지역 조사 잘 이뤄져야"
국내에서 생활 SOC는 생소한 개념이지만, 해외에서는 SOC가 기능을 넘어 주민들의 자산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일례로 프랑스 리옹시는 공공건축물의 지하 공간을 활용하여 주차난을 해소했다. 리옹시에 존재하는 50여개의 주차장 중 22개는 유적지에 위치한다. 기존 시설을 변형해 주민들을 위한 아름답고 쾌적한 지하주차장을 마련한 것이다. 일본 구마모토시에는 1936년에 건설된 마미하라교를 휴식 공간으로 변형한 사례가 있다. 낡은 다리에 강을 내려다볼 수 있는 구멍을 만들고 삼목나무로 만든 목판을 더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처럼 다양한 시도는 공공의 공간을 창조하고 낡은 것을 생활공간으로 전환했다.
국내 생활 SOC의 모범 사례로는 구산동도서관마을을 꼽을 수 있다. 서울시 은평구 구산동에 위치한 구산동도서관마을은 동네에 도서관이 있으면 좋겠다는 주민들의 작은 바람으로 시작됐다. 주민들은 도서관을 지어달라는 서명 운동부터 실천했다. 이에 구청은 부지를 마련해주었지만, 예산 확보라는 숙제가 남아있었다. 마침 시행 중이던 서울시 주민참여예산사업에 응모해 선정된 것이 2012년이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설립을 위한 노력을 진행해 이듬해인 2013년에 구체적인 도서관마을 조성 계획을 수립했다. 청소년들이 직접 시청각어린이청소년도서관 공모사업에 도전해 예산을 모으기도 했다. 이러한 주민들의 노력이 모여 2015년 11월에 개관했다. 공공서비스를 요구한 시점부터 설립까지 타 도서관보다 비교적 오랜 시간이 요구됐지만, 주민들의 참여가 만들어낸 노력이기에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도서관이 되었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이 주목받는 이유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이 하나의 마을 공동체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보통 동네에 있는 도서관을 지칭하는 이름인 '마을도서관'이 아닌 '도서관마을'이라는 이름에서도 이를 유추할 수 있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은 책만 제공하는 도서관이 아니라 주민들의 수요에 맞춘 다양한 문화 활동과 아이들을 위한 공간 등을 마련한 마을이다. 주민들이 도서관 운영에 직접 참여하고, 지자체와 정부는 주민들의 활동을 후원하는 식이다. 인프라를 이용하는 당사자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SOC라고 할 수 있다.
구산동도서관 문화정책 팀장은 "도서관 설립까지의 과정도 그렇고, 현재 주민들로 이루어진 협동조합이 도서관 운영을 맡고 있다는 점에서 '마을 공동체'라고 부르고 있다"며 "도서관이 마을의 사랑방처럼 주민들이 모이고 소통할 수 있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서관의 건축도 주목을 받았다. 구산동도서관마을은 연립주택 몇 채를 도서관 형태로 리모델링한 건축물이다. 예산이 부족해 신축건물을 짓지 못한 상황이 오히려 구산동도서관마을의 독특함을 만든 것이다. 기존의 것을 완전히 허무는 대규모 건설을 하지 않더라도 좋은 인프라를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마을마당이라 불리는 1층 로비는 5층까지 천장이 뚫려 있다.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기며 각종 전시회와 이벤트가 열리는 공간이다. 또한 도서관을 이루는 방은 55개로 만화방, 키즈카페, 향토자료실 등 기존 도서관에서 볼 수 없는 공간들이 많다. 구산동 도서관 마을은 2016년 '서울시 건축상'과 '대한민국 공공건축상'에서 대상을 받았다.
문 대통령은 구산동도서관마을에 대해 "골목을 살리고 마을 자원을 소중히 활용하는 도시재생 사례"라고 평가했다. 주민들의 요구와 참여를 바탕으로 추진된 생활 SOC의 사례를 구축하는 노력이 생활 SOC의 정체성 확립을 도울 것으로 보인다.
권대중 명지대학교 교수는 "여태까지 한국에서 진행된 도시재생은 주민들에게 와 닿는 형태는 아니었다"며 "생활 SOC를 확대해 주민들의 골목 안까지 다가갈 수 있는 도시 재생 사업을 실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예산을 낭비하지 않도록 앞으로 철저한 감독과 감시가 필요하다. 지역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되어야 정말 필요한 투자를 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서지윤 KSRN 기자
편집 KSRN집행위원회(www.ksrn.org)
이 기사는 뉴스토마토 보도준칙 및 윤리강령에 따라 김기성 편집국장이 최종 확인·수정했습니다.
ⓒ 맛있는 뉴스토마토, 무단 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