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을 4일 앞둔 지난 11일, 일제강점기 징용 피해자인 근로정신대 할머니들과 유족들이 일본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낸 민사소송에서 승소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근로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은 징용 피해자·유가족들과 함께 미쓰비시를 상대로 2012년부터 3차에 걸쳐 손해배상 소송을 진행해오고 있지만, 한국 내 소송에서 승소해도 사측으로부터의 사과와 배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미쓰비시 머티리얼(옛 미쓰비시 광업)이 2015년 강제노역에 징용되었던 미군포로들에게 사과하고 2016년 중국인 피해자들에게―진정성은 결여되었으나―사과와 배상을 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지난 11일 일제 강제노역 피해자들이 전범기업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2차 손해배상 소송에서 일부 승소했다. 이날 오후 광주 동구 광주지방법원 앞에서 근로정신대 피해자 양금덕, 김재림(87·여) 할머니, 고 오길애 할머니의 동생 오철석(81)씨가 취재진 질문에 답하고 있다. 사진/뉴시스
징용 피해자들과 일본의 전범기업
한국인 징용 피해자들은 미쓰비시를 비롯한 일본 전범기업들에 대해 꾸준히 소송투쟁을 해오고 있으나 일본에서는 패소하고 한국에서는 승소해도 실효가 없는 실정이다. 2015년, 강제징용의 피해자였던 미군포로들에게 사과하고 영국과 호주, 네덜란드의 전쟁포로들에게도 사과 의사를 밝혔던 미쓰비시가(그리고 일본정부가) 한국인 징용 피해자들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법적인 상황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즉, 한일강제병합으로 인해 당시 한국인들은 ‘일본인’이었으므로 그들의 징용은 1938년 국가총동원령에 의한 적법행위라는 것과,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1965년 한일협정 당시 한국 측이 5억 달러를 받은 것으로 이미 종결되었다는 것이다.
강제노역에 동원되었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2016년 처음으로 미쓰비시 머티리얼로부터 불충분하나마 일종의 사과와 배상을 받기까지―미쓰비시 측이 ‘사용자로서 책임을 진다’거나 ‘배상’ 대신 ‘중일우호기금’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피해자들의 반발을 사기는 했으나―중국인 강제노역 피해자들의 소송 역시 계속되었었다. 중국인 피해자들의 일본 내 소송에서 2007년 최고재판소(대법원)는 ‘중국이 전쟁 배상의 청구를 포기한 1972년 중·일 공동성명에 따라 개인의 배상 청구권도 포기됐다’고 판결했는데, 이는 1965년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 협정을 들먹이며 청구권 청산과 더불어 국가 차원에서의 배상 의무가 소멸되었다고 한국의 일본군 ‘위안부’와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와 배상을 거부한 것과 흡사하다.
소년 고은의 마을사람들과 징용
이 전범기업 미쓰비시가 19세기 후반 탄광사업을 개발해 큰 수익을 거둔 곳이자 일제강점기 말 조선인 징용 노동자들에게 ‘감옥 섬’ 내지 ‘지옥 섬’이 되었던 곳이 바로 나가사키 근처의 섬 하시마(端島), 일명 ‘군함도’이다. 혹독한 작업환경 속에 죽어나간 노동자들 중 징용당해 와 있던 조선인들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그러나 하시마 탄광의 어둠의 역사는 근래 몇 년 들어서야 대중에게 알려질 정도로 지난 수십 년간 묻혀 있었고, 비극적 사실은 은폐된 채 '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으로 인정된 이 섬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논란 속에 놓여 있다. 하시마가 속해 있는 나가사키를 비롯해 후쿠오카, 사가 현은 규슈 지방에서 탄광 지역으로 유명했는데, <만인보>에 나오는 ‘구주 탄광’이 바로 이 규슈(九州, 구주)의 탄전을 가리키는 것이다.
군산 세관 앞 남원옥에는
우리 동네 새터 대규 아저씨 동생 상규 아저씨가
우두머리 숙수로 가 있다
언제부터 음식 재주가 있었던지
언제부터 조왕대신 섬기는 운수 있었던지
버젓이 남원옥 숙수로 가 있다
남원옥이라면 입맛 찾는 집인데 모르는 사람 없는데
동네사람들 묵은장 갔다가 굴풋하면
거기 가서
상규 잘 있었는가 하고 수작한다
아이고 어서 오세유 하고
주인마나님 보나마나
큰 가마솥 뚜껑 홀라당 밀어붙여
우우우우 천장 녹이는 김 솟아난 뒤
그 맛있는 국물에다
뜨뜻한 밥 한 사발 후딱 말아준다
동네사람이라면
누구 하나 마다지 않고
이렇게 국 대접 밥 대접인데
술이야 그냥 낼 수 없으니
외상으로도 먹고
한푼 놓고 먹기도 한다
< … >
그러던 상규가 그만 징용으로 끌려갔으니
구주 탄광 거기 가서도
그 무엇이라나 취사장이라나
그 취사장 숙수로 살아 있을까 죽었을까
(‘남원옥 숙수’, 4권)
고은 시인이 소설 형식으로 쓴 자서전을 보면, “1904년 수리개간사업을 가장 큰 규모로 시행하기 시작한 일본의 불이흥업주식회사는 옥구 일대에 광대한 농장을 설립”해 “일본 구주지방에서 농업 이민이 계속 건너왔다”고 밝히고 있다. 1924년 이주자 33가호가 도착한 이래 3백여 호 약 2000명의 일본인이 시인의 고향인 옥구 일대에 군림했는데 이것이 불이농촌이었고, 이는 1930년대 일본이 쌀 공황을 겪으며 조선 땅을 식량기지로 삼게 된 것과 연관이 있었다(<고은전집> 23권 ‘황토의 아들’, 김영사 2002년, 82쪽). 새로 부임한 처녀 교사도, 소년 고은의 1학년 때 담임과 교장도 구주 사람이었고, 불이농촌의 일본인들도 다 구주사람이었으며 구주지방의 지명을 따 미야자키 농장이니 구마모토 농장이니 하는 것이 있었음을 시인은 회상해낸다(같은 책, 165쪽). 상규 아저씨 외에도 구주탄광으로 징용당해 가 “소리 하나 없는” 마을 아저씨는 또 있다.
만경강 하구 큰바다까지
떠나는 서방 붙잡으려고
달려간 옥구면 선연리 난산마을
섬 한점 될까 말까 하다가
그만둔 난산마을
그 마을 이십릿길 질턱질턱한 길 걸어서
잔생선 가지고 오는 아저씨
코찡찡이 아저씨
장다리꽃 핀 것 보니 살맛난다고 어쩌고
생선 팔 생각 까먹고
누구 만나면 이야기뙈기 하기 좋아하는 아저씨
일제 말기 현해탄 건너
구주탄광 징용으로 끌려가더니
난산마을 빈 개펄 장어 같은 물줄기 따라가봐야
어드메 들리는 소리 있다고
돌아다봐야
끝내 난산마을 아저씨 돌아올 줄 모르는 아저씨
< … >
이제는 소리 하나 없는 난산마을 아저씨 저승 아저씨
(‘난산마을 아저씨’, 1권)
지난해 하시마에 생긴 새로운 안내판. 강제징용의 단어는 찾아볼수 없다. 사진/뉴시스
남양군도로 끌려간 사람들
고은 시인의 막내 삼촌인 맹식이 삼촌도 징용으로 일본 땅에 끌려갔는데, 소년 고은의 기억은 이러하다. “이윽고 삼촌은 일본땅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그때 동네사람들은 맹식이 삼촌이 죽으러 간다고 말했다. 징용이란 곧 죽음을 뜻하고 있었다. 그런데 1년 뒤 삼촌으로부터 소식이 왔다. 우리집에서는 소리치며 기뻐했다. 그러나 동네 어른은 아직까지는 살았을지라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 해서 그 기쁨은 수심하고 함께 있었다. 삼촌이 있는 곳은 일본 북쪽 끄트머리 아오모리라는 고장이었다. 그곳 탄광에서 편지와 사진을 부쳐 온 것이다. 나는 아오모리의 도와다코라는 경치 좋은 호수 사진이 찍혀 있는 사진엽서를 보고, 아아 삼촌은 참 좋은 데를 구경하며 지내고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 … > 삼촌은 탄광 광부가 되어 몇십 길도 넘게 땅 밑으로 내려가서 일을 끝낼 때까지는 나올 수 없고, 그런 때는 땅 위에서 내려간 관으로 화투도 내려 보내고 먹을 것도 물도 내려 보낸다는 사연을 엽서에서 보고, 그 탄광 노동이 얼마나 처참한 것인가를 생각하는 일 따위는 전혀 모르고 그런 삼촌의 지하 갱내 생활을 퍽 신비스럽게까지 여기는 터였다.”(<고은전집> 23권 ‘황토의 아들’, 158-159쪽)
한편, 구주탄광 외에 마을사람들이 또 끌려간 곳은 남양군도이다. 일본 본토에 있던 맹식이 삼촌은 해방 후 다행히 고향으로 돌아왔으나, 구주로, 남양군도로 징용당해 갔던 사람들과 정신대로 끌려갔던 마을사람들 중 해방이 되어도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이 있었는데, 고은 시인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마을에서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 중 몇 사람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소식도 없었다. 또 정신대로 잡혀간 처녀 세 사람도 영영 소식이 없었다. 그 처녀들의 집은 한결같이 몇 해째 지붕 이엉을 잇지 못해서 비가 오면 빗물이 주룩주룩 새고 여느 날은 냇가의 줄풀까지 올라가 돋아 지붕골의 썩은 데서 우거져 있었다. < … > 처녀의 어머니는 딸이 돌아오지 않아도 슬퍼할 줄도 몰랐다. 슬픔까지도 배부른 사람의 것이었다. < … >
그런데 외갓집 이웃에서도 동남아 자바에 가 있는 아들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풍편으로 아들 소식을 들은 외할머니의 단짝인 그 할머니는 우리 아들 잘 있다네 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목청을 돋우고 있었는데, 그 소식인즉 그곳 포로수용소 감시원이었던 아들이 일본군 상사 몰래 영국 포로들을 잘 보아준 대가로 전쟁 뒤에 풀려난 영국인들이 그에게 넓은 고무나무 숲과 아주 큰 건물과 그곳 미인까지 아내로 삼아 살게 함으로써 자바에서 몇째 안 가는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자바라는 곳을 지리부도에서 찾아냈다. 싱가포르도 찾았다. 그러면서 만주로 북지北支로 동남아로 남양군도로 끌려갔다는 정신대 처녀들도 막막하게 떠올렸다. 아, 이렇게 먼 곳으로 가서 돌아오지 않는단 말인가.“(<고은전집> 23권 ‘폐허의 영혼’, 288-289쪽)
소년 고은의 외할머니의 단짝이자 자바에 징용 간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만인보>에 이렇게 등장한다.
외갓집 이웃집 할머니
외할머니 단짝인 할머니
머리 곱다랗게 빗은 할머니
< … >
그 할머니 아들이 징용으로 끌려가
싱가포르인지
자바인지로 끌려가
그놈의 전쟁 끝나고도
돌아올 줄 모르는데
밥 한 숟가락 김치 얹어 먹다가도
아들 생각
숫처녀 시절 이야기하다가도
갓 쓰고 오던 총각 이야기하다가도
아들 생각
뒤보다가도 뒷간에서
아들 생각
아이구 내 새끼야
어디 가서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이구 내 새끼야
그 집 작은아들 새 며느리
뒷간에 들어가다가
칙간 귀신이 우는 소리로 알고
기절초풍하여
뒷간 앞 땅바닥에서 놀란 뒤
어찌 사람이 시원찮아 흰소리 헛소리 실성하였네그려
하고 외할머니가 와서 딱한 일 말하는데
어머니는 아무 대꾸 없이
어린것 바짓가랑이 타진 데
바늘 가는 데 실 갈 따름
(‘아들 생각’, 4권)
남양군도는 미크로네시아 일대의 섬들로, 1914년 일본이 점령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베르사유 조약에 의거해 공식적으로 일본 제국의 위임통치령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에는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따라 미국의 신탁통치령이 되었던 곳이다. 일제는 '농업이민‘이라는 명목으로 남양군도에 농민들을 강제 징용했는데,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1939년~1941년 사이에만 5000여 명 이상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이들 중 다수가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 출신이었다고 하니, 고은 시인의 자서전이나 <만인보>에 남양군도가 종종 등장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강제 징용 피해자들은 비행장 건설과 사탕수수 재배에 동원되었다. 현지 원주민들이 조선인들의 ‘아이고’라는 신음소리를 듣고 다리에 이름을 붙여 ‘아이고 다리’라고 했다니 그들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할만하다. 이들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총알받이로 몰리고 폭격·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다수가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생존자들의 경우 구사일생으로 고국에 살아 돌아오기도 했으나 많은 이들은 귀국하지 못한 채 그곳에 남게 된다. 2006년에 발굴·공개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의 문서에 의하면, 1930년대 후반 이후 남양군도로 강제동원되었다가 1945년 광복 후 귀국하는 한국인 승선자 명부 1만996명은 농업 관련자 및 일반인 6880명, 군속(군노무자) 3751명, 군인 190명, 일본 귀환 조선인 175명으로 분류되어 있다. 이 승선자 명단에 낄 수 없었던 수많은 이들 중 한 명이 아마 다음 시에 나오는 ‘과부 문씨의 지아비’였으리라.
일찍이
그리도 정 많던 지아비
살짝곰보
넉넉한 심성에
정 많던 지아비
일제말 남양군도 징용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논일 밭일 다 그녀의 것이었다
큰놈 자라났다
유복자 작은놈도 자라났다
6·25사변에 큰놈 군대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아버지 얼굴 못 본 작은놈
대처 구경 갔다가
돌아오는 길
적령기 아닌데도
국민방위군에 강제로 끌려갔다
훨씬 뒤에야 그렇다는 소식이었다 캄캄한 날들이었다
그녀 혼자 삼복더위 논에 나가 두벌 김매고 있었다
남평 문씨 그녀 등때기에 햇볕이 무정했다
< … >
(‘과부 문씨’, 16권)
박성현 파리사회과학고등연구원 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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