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반론이 제기되긴 하지만 현생 인류의 발원지는 아프리카로 받아들여진다. 알다시피 현생 인류는 지혜로움을 갖춘 ‘호모 사피엔스’이며 더 정확하게는 ‘호모 사피엔스 이달투(Homo sapiens idaltu)’ 등 ‘호모 사피엔스’ 아종 중에서 유일하게 번성하는 데 성공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다.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선조는 아프리카에서 살다가 세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른 바 인류학에서 말하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이다.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인류학 용어이면서 같은 제목의 영화이기도 하다. 1985년 개봉된 이 영화는 영국 식민지 시절의 케냐에서 펼쳐지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그렸다. 장소가 케냐이지만 주인공 남녀는 흑인이 아닌 백인이다. 영화 속에선 지금보다 30살이나 ‘젊고’ 매력적인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레드퍼드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당시 30대인 메릴 스트립은 그렇다 치고, 그때 이미 지금의 내 나이에 근접한 로버트 레드퍼드의 영화 속 아름다운 젊음은 아무리 영화라 하여도 터무니없는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확인해 보니 레드퍼드는 1936년생으로 선친과 몇 살 차이가 나지 않는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는 제목과 달리, 광활한 아프리카를 배경으로 남녀의 사랑을 달달하지만 유장하게 전한 것으로 내 뇌리에 남아 있다. 레드포드가 스트립의 머리를 감겨주는 극중 장면이 떠오른다. 이 장면은 로맨스의 감미로움을 섬세하게 표현한 대표적인 영화속 이미지로 회자된다. 영화가 전하는 또 다른 기억은 커피다. 극중 스트립은 커피농장을 하기 위해 케냐에 왔다. 커피의 사계 등 커피농장과 관련한 다양한 장면이 등장한다. 이 영화는 유명한 로맨스 영화이면서 동시에 유명한 커피영화이다.
Out of Africa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시대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다. 시대배경을 비롯하여 지역과 배치되는 남녀 주인공의 피부색, 영국령 식민지란 설정 등 이 영화는 로맨스를 다루지만 제국주의를 피해갈 수 없다. 커피농장 또한 서구 제국주의와 관련된다. 바나나 커피 등을 단작(單作)하는 대규모 플랜테이션 농업은 제국주의의 유산이다. 영화 속 주인공 남녀는 많은 연유로 분명 제국주의에 기반할 수밖에 없지만 그들 자체가 제국주의자 혹은 식민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랑은 어떠한 사악한 한정도 가볍게 돌파할 수 있는 일종의 구원이고, 인간사의 최종 주제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러하였듯 행복한 결말을 맺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커피도 약간은 그렇다. 당연히 커피에서 대단한 구원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러한 기대치를 감안한다면 커피는 인간에게 제법 큰 위로와 행복, 나아가 자존을 부여하는 셈이다. 그저 사소한 수준에서 말이다.
영화 속 사랑의 무대에서 지도상으론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에티오피아는 공교롭게도 커피의 원산지이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의 고향과 커피의 고향은 작은 축척으로 보면 인접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6~7세기 무렵 지금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에서 살고 있던 칼디(Kaldi)라는 목동이 커피를 처음 발견하였다. 염소(혹은 양일 수도 있다)들이 빨간 열매를 먹고는 흥분한 채로 잠을 안 자고 뛰어다니는 광경을 목격한 칼디는 모험심을 발휘하여 자신도 이 열매를 먹는다. 이 열매, 즉 커피콩에서 각성효과를 체험한 칼디는 이슬람 사원의 수도승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이후 커피가 졸음을 방지하는 등 수양에 도움이 되는 신비의 열매로 알려지면서 이슬람 세계로 넓게 퍼져 나갔다. 이슬람에서 처음으로 커피가 인간의 음료로 수용된 것이다.
커피를 지금처럼 볶아먹게 된 계기에 관해서도 전설이 전하는데 앞서 소개한 전설과는 조금 내용이 다르다. 목동 칼디로부터 커피콩의 각성효과를 전해들은 수도승은 먼저 소개한 일화와 달리 커피콩을 “악마의 열매”로 단정하고 태우도록 조처하였다. 그런데 태운 커피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그 냄새에 빠져서 이후로 커피를 볶아 먹게 되었다는 게 전설의 요지로, 고증되지 않은 정설이다.
에티오피아 목동의 발견으로 인간의 음식이 된 커피는 9세기 무렵에 아라비아로 전해짐으로써 아프리카를 벗어나게 된다. 커피는 이슬람 세력의 확장과 함께 전 세계로 퍼졌다. 커피가 유럽에 전파된 시기는 오스만 제국 때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이슬람인의 커피사랑은 후대 영국인의 차사랑에 못지않았다고 한다. 이슬람의 음료로서 커피가 기독교의 유럽에 전해지자 이슬람을 적대시한 유럽인들은 “악마의 유혹”, “사악한 나무의 검은 썩은 물” 등으로 처음에는 커피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막상 맛을 보면 커피의 맛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커피를 둘러싼 이 같은 교착은 교황 클레멘스 8세(재위 1592.1.30∼1605.3.3)가 “이렇게 좋은 걸 저 이슬람 놈들만 마시는 건 말도 안 돼”라며 커피 반대론자를 물리치고 커피를 축복함으로써 해소되었다. 클레멘스 8세의 커피 축복 사건은 커피의 역사를 다룬 글에서 공통적으로 인용된다. 이때 이후로 커피는 유럽과 기독교 세계로 영역을 확장한다.
이세돌과 한 잔의 커피
2016년 봄의 최대 사건은, 매년 있는 개화일 리가 없고 아마도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가 아니었을까. 전 국민과 어쩌면 전 세계인의 관심을 모은 이 ‘매치’에서 개인적으로 제일 가소로웠던 건 터미네이터 운운하며 인간과 기계의 대결로 묘사하는 일부의 전달 방식이었다. 인간과 기계 사이의 대결 같은 떠들썩한 호들갑은 문제의 본질을 비껴간다.
이세돌의 선방에도 불구하고 장기적인 수읽기의 관점에서는 어차피 컴퓨터가 인간을 압도할 수밖에 없다. 무한대에 가까운 바둑의 모든 수를 컴퓨터가 다 읽을 수는 없기 때문에 컴퓨터가 예상하지 못한 수를 두면 승산이 있다는 생각만큼 인간과 기계의 대결에서 기계의 승리를 보증하는 것은 없다. 한번 두어진 예상하지 못한 수는 다음 판엔 늘 예상가능한 수로 바뀔 것이기에 인간이 매판 컴퓨터의 허를 찌름으로써 승리를 확보해야 한다면, 승산의 계산이 무의미할 뿐더러 그것은 더 이상 대결 혹은 대국이라고 할 수 없다. 천문학적인 수읽기가 가능한 알파고가 인간을 이기는 게 정상이고 인간이 알파고를 이기는 게 비정상이다. 어쩌면 당분간 인간 최고수가 알파고에 일격을 가할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당분간이다.
알파고의 바둑을 보는 몇 가지 관점이 존재할 텐데, 그중 하나는 저것이 그냥 수 읽는 기계로 연산을 행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다. 반면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기사인 이세돌은 바둑을 두었다. 연산과 바둑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연산기계와 인간기사 사이의 이른 바 대결은 어쩌다 재미로 해볼 수 있겠지만, 그 승패가 인간 존재를 회의케 할 만큼 사활적인 것은 아니다.
기계에 맞서 인간존엄성을 지켜낸 인간승리 식의 문법도 조금은 과장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불확정성과 감정의 동요 가운데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려고 애쓰는 이세돌의 모습은 그냥 우리 인간의 모습이다. 연산기계처럼 우리도 어느 정도 확률을 가늠하지만 인간사에서는 무작정 확률이 높은 쪽으로 가지 않을 때가 종종 등장한다. 특히 바둑을 떠난 인간사에서 확률로 결정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라는 종은 존엄한 생존을 위해 가치와 의미라는 걸 발명 혹은 발견했고, 이것은 승패를 넘어선다.
기계는 승리에 최적화하지만, 인간은 적어도 우리가 인간이라고 힘주어 말할 때는 가치를 지향한다.
이세돌과 알파고 대국은, 승패가 아니라 많은 인간에게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인간에 대해 생각할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그런 관점에서 알파고는 기계적 현상이 아니라 인간적 현상이다. 개인적으로 대국 중 이세돌에게서 눈여겨 본 것은 그의 오른 편에 놓인 하얀 머그잔이었다. 그 안에는 1500년 쯤 전에 목동 칼디가 발견한 커피의 추출액이 들어 있었고, 깨질 듯 연약해 보이는 이세돌은 커피를 들이키며 각성하고, 손가락을 떨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수를 헤아리는 데 집중했다.
AlphaGo resigns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감겨주는 장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았듯, 이세돌ㆍ알파고 대국에서는 이세돌의 하얀 머그커피잔이 종종 생각나지 싶다. 그러나 그 대국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4국에서 알파고가 돌을 던질 때 화면에 뜬 문구였다.
“AlphaGo resigns”
나는 “resign”에 붙은 s에 주목하였다. 알파고가 스스로를 3인칭으로 인식했다면, 화자가 누구일까 하는 의문이었다. 인간 어린 아이가 그러듯 알파고란 프로그램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도 있고, 프로그램이 복잡하게 구성돼 말하자면 다중인격이어서 “resign” 기능의 담당부위가 다를 수도 있겠다. 아니면 결정을 단순하게 모니터에 형상화하는 별도 프로그램이 있을 수도 있고, 아무튼 알파고는 1인칭이 아니었다.
철저한 1인칭 이세돌과 싸우는 상대가 3인칭이라면 숨어있는 1인칭은 누구일까. 마르크스는 기계가 노동자를 노동에서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노동으로부터 일체의 내용을 빼앗아버리는 상황을 걱정하였는데, 나는 이것을 1인칭의 소멸로 이해한다. 또는 1인칭의 소멸이 아니라 1인칭의 은닉일 수도 있겠다. 기계가 3인칭으로 인식되는 한 인간은 기계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진짜 걱정은 3인칭 기계 너머의 1인칭이다. 그렇다면 이세돌ㆍ알파고 대국에서 떠올려야 하는 영화는 <터미네이터>가 아니라 <헝거게임>이어야 한다. 여전히 싸움의 상대는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며, 그래서 우리는 아직 인간인 게다.
삽화/김희헌
안치용 토마토CSR연구소장